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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좀 진지하게 생각한 이야기

'고통'과 '공감'

1.
세상이 점점 더 혼탁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은 
개인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있는 좌절 분노 억울함 원한 등의 미아스마(독기)가
미처 해소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더 쌓이고 쌓이기에 그런 것은 아닌가?
지금만이 아니라 수 천년 전의 미아스마들도
비록 사람은 죽어서도 그 지독한 기운만은 여전히 씻겨 나가지  못하고 떠다니니
이 세상이 어찌 뿌옇고 칙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갑자기 무슨 귀신 같은 쓸데없는 소리인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20여 년 전 한때 전국을 들썩였던 유명한 드라마의 대사 한 마디이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장면만은 어찌나 유명하였든지  몇 번 보게 되면서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은 왜 이 대사에 그리 감동을 하면서 열광을 하는 걸까?
그것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해주는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다는 환상일 게다.
더구나 그가 엄청 잘생기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어디 그 '고통'이 남아 있겠는가? 미아스마가 되어 떠돌 수 있겠는가?
 
2.
트로이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마주한 아킬레우스의 슬픔과 분노는 물론 대단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후 펼친 만행을 이해할 수, 용납할 수 있는 건가?
자신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한 적장 헥토르에게 최소한의 예의로서 시체를 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전차로 시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녀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 형제의 가슴에 대못을 박더니
나아가 시체를 개에게 먹이로 주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능력에 맞지도 않는 파트로클로스가 전장에 나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 단초는 무엇이었나?
결국 아킬레우스 본인이 포로로 잡혀온 여자 하나를 놓고 아가멤논과 다투다가 삐진 결과이지 않은가?
더구나 자신의 투구와 무기를 파트로클로스에게 준 이가 누구인가?
그러기에 어찌 보면  파트로클로스를 사지(死地)로 내몬 이는 다름 아니라 아킬레우스 본인인 셈이다.
결국 자식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적진을 뚫고 직접 찾아온 늙은 프리아모스가 금은보석을 바치며  어린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의 호소를 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풀었어야만 했는가?
 
아무리 파트로클로스가 그냥 친구가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관계(?)였다고 추정한다고 하여도
그의 빗나간 분노와 화풀이는 나의 가치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을 분노와 슬픔을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는 장면으로 이해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냥 태생적으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타고난 특출한 재능으로 지 잘난 맛에 겨워 살아가다가
처음으로 맛본 슬픔에 미쳐 날뛰는 위험한 망나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아킬레우스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예의를 차리거나 깊이 공감하는 것은 없다.
그 앞에 값진 금은보화를 바치고 무릎 꿇고 눈물을 흐리며 용서를 빌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3.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칼날에 진멸하여 죽이매,
그날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수 천년이 지난 2024년 오늘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넓은 들판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그때에는 칼날이었다면, 오늘은 미국이 적극 지원해 준 최신형 탱크와 미사일로 말이다.
 
하지만 레위기를 보면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거류민을 너희 중에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이집트) 땅에서 거류민이 아니었느냐'
맞는 말이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으니, 다른 민족 사람들도 잘해줘야 한다.
더구나 20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디아스포라'로서 겪은 그 가혹한 고난의 역사를
어찌 내가 여기 몇 줄로 옮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지난한 고통 속에 힘겹게 정착한 그들이기에,
더구나 그 과정도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대량 학살의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기존 잘 살고 있던 민족을 강제로 쫓아내며 약탈하는 과정이었기에,
지금 뜨거운 분노에 차 있는 주변의 민족들과 가능한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유대민족에게 또다시 모든 죄악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야 하는가?
어찌 보면 야훼가 스스로를 유일신이라 주장하며-'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는데, 그게 그 땅이 아니었던 것인가?
수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땅에는 여전히 신민이 흘리는 피와 죽은 살덩이 만이 넘쳐나고 있으니...
 
그러면서 가만히 다시 묻는다.
야훼가 '학대하지 말고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한 거류민'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히며 죽어가야만 했던 기존 가나안 정착민들의 고통과 눈물에 대해서는 어찌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단 말인가?
결국 야훼에게는 그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자들
즉 그에게 무조건적 충성과 복종을 하지 않는 이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4.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많은 요소들 중에
최근 개인적으로 가슴에 새겨보는 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삶은 두카(苦)로 가득 차 있는 곳이기에 모크샤(解脫)를 향한 타파스(苦行)의 길은 생각만으로도 힘겨워 보인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그 길의 끝에 다다른다는 상상조차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긴다.
우리는 단지 그 험난한 길을 때로는 낙타처럼, 때로는 사자처럼,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때로는 바보처럼 웃으면서, 때로는 지쳐 쓰러질 듯이, 때로는 애써 초연한 듯이 모른 채하며
그렇고 그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나갈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겨 나간다'는 표현을 쓰기가 힘들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힘겨움 속에서도 누구 하나 대신해 줄 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간절하게 바라는지 모른다.
나의 고통을 나누어 줄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나의 힘겨움에 같이 '공감'해줄 누군가의 따뜻함을 말이다.
거기에 그 어떠한 특별한 조건이나 이유를 달지 않은 채 말이다.
이제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Elpis)을 가슴에 담기에는 나이가 들어버렸기에
이제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만을, 아니 너무 급전직하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남은 것은 몸뚱이 밖에 없는 이 초라한 삶에 무엇을 더 내놓으란 말인가?
 
그냥 더 바라는 것 없이 더 이상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 공감해 주는 것이 유난히 간절하게 느껴지는 시대이며 삶의 시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