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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다녀온 이야기

강화 나들길 - 3

아침에 잠시 고민을 해본다.

어제 중간에서 멈춘 2구간을 가야하나? 아니면 그냥 3구간을 갈까?

'에이 어차피 완주할 것도 아니니 그냥 전등사도 볼겸 3구간으로가자.'

사람들은 단풍에 대해 저 마다의 사연과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전등사의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고 기억한다.

여러가지 사연으로 힘들었던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군대에서 나름 정신적 안정을 찾은 시기.

가을이 깊어지는 시기가 되면 가족과 함께 간혹 들렀던 강화의 전등사.

어쩌면 처음으로 노랗고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을 제대로 느낀 시간이 아니었는가 한다.

그러기에 그 추억은 가슴 깊이 깊이 새겨지고 말이다.

이후, 설악산 지리산 내장산등의 경치에 감탄을 하였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의 단풍은 언제나 바로 그 '전등사의 단풍'이였으니.

하지만 강화 나들길 3구간에는 전등사가 빠져있다.

그래도 굳이 그 길을 애돌아 가야만 한다. 언제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입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전등사로 접어든다.

평일날 아침이라 몇몇 보살과 처사들 만이 조용히 이리저리 움직이고 ,

다른 이의 기척은 없는 호젖한 정취를 마음껏 즐기는 그런 호사를 누리는 복을 받게 되다니...

근 20년의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어렴풋이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바로 그 단풍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단지 나만의 감흥만이 아니라, 원래 이 곳의 단풍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확인하는 셈이다.

이 곳 관해암은 공사가 한참이다.

하지만 저 멀리 평야를 끼고 펼쳐지는 바다의 전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사진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니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전등사는 성곽안에 둘러싸인 양상이다.

어느듯 한국의 불교를 이야기 하자면 '호국(護國)불교'라는 개념을 떼 놓고는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 들곤하다.

원래의 '호국불교'라는 개념은 온누리에 불법(佛法)이 가득하여 나라를 굳건하게 지킨다는 의미인데,

군사 독재 시절의 삐뚤어진 역사 해석은 임진란 등에 칼과 창을 들고 싸운 승병들의 이야기로만 일관되고 있으니,

아무리 종교가 각 나라의 특징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승려-다른 종교인이라 하더라도-가 상대방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르고 수족을 자르는 것을 권장한단 말인가.

'삼랑성-정족산성'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단군의 세 아들이 축조하였다는 전설의 힘인지, 병인양요에서 프랑스의 군대를 막아낸 곳이라 한다.

200여 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성이지만, 저 멀리 펼쳐진 평야와 해협을 바라 보노라면

이곳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핑계로 다 둘러 보지는 못하고... -- 역시 게을러졌어.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저 멀리 멋진, 그리고 약간은 특이한 건물이 보여 들렀다.

문루의 종이 특이하게 느껴졌으며, 외관은 한옥 형태로 지은 성공회 성안드레아 성당이다.

지붕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바로 옆의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면 교회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색해 보이기도 하다.

저 멀리 이규보의 무덤이 보이기 시작한다.

'...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몽고군)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수 많은 문신들이 죽어나가던 시절, 약간의 글 재주로 권력의 끄터머리에서 부터 올라가더니,

몽고의 침입으로 전국토가 적의 말발굽에 유린 당하고 백성들은 짖밟히고 찢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데도,

제대로 된 군대는 전부 사병과 삼별초로 구성하여 '천도'를 핑계로 강화에 쳐박혀 있던 무신 정권에 빌붙어

개인적 안락의 삶을 이어가며 이런 말도 안되는 노래나 불러대던 그의 묘는 왜 이리 거대한건지...

문득 서정주의 이름이 머릿속에 교차되어 지나간다.

일제 시대에는 너무도 깊이 현실 정치에 개입(참여)하여 '천황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고 떠들더니

다까끼 마사오 시절에는 월남 파병에 대한 격문을 띄우고,

전두환 시절에는 15살이나 어린 그에게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라는 낯 뜨거운 짓을 서슴치 않았던

'다쓰시로 시즈오'의 이름은 지금도 남한 문단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더불어 같이 떠오르는 이름 하나와 쓸데없는 상상.

만약 북으로 끌려갔던 이광수가 폐렴으로 일찌감치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한 문학의 흔적을 남겼을까?

여전히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과 반공의 논조를 이어갔을까?

아니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성을 자랑하는 글빨로 김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며 부귀영화를 누렸을까?

이규보 스스로는 개경에서의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이 어찌 이 네가지-사가제- 뿐이었겠는가.

더구나 그 속에는 수많은 동료 문신들과 백성들의 피눈물이 어려 있건만,

강화의 안락한 삶 속에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향수요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었을 게다.

강화의 특산품이라면 역시 '인삼'을 빼 놓을 수 없을 터인데,

그 옆을 흐르는 물 땟깔을 보면, 그리 땡기지는 않는다.

길은 어느듯 포장 도로를 벗어나 야트막한 언덕길로 향한다.

이곳 저곳에 몇몇 유적지의 흔적이 있으나, 길이 묵은 탓인지 가시 덤불등으로 접근이 어려워 그냥 지나친다.

그래도 '강화 석릉'과 '강화 가릉'의 길은 제대로 있어 다행이다.

이제 3구간의 마지막이 다가온다.

갈등이다.

처음의 계획대로 4구간을 걷고 1박을 더 하고 내일은 석모도를 돌아볼까? 아니면 여기서 쫑을 낼까?

배도 고프기에 근처 식당에서 배를 채우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 배가 부르면 힘든 길을 포기하게 되어 있는데... ㅎㅎㅎ

그래서,

그냥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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