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어제 마치지 못한 글을 마저 끝내고 짐을 챙겨 출발한다.
일찍이 봐뒀던 '현곡면'을 둘러 볼 예정이다.
경주 토박이인 후배 헌영이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정리 쪽으로 둘러볼 예정이다.
11월 초순이지만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분다.
버스를 기다리다 바로 옆에 '수제 빵집'이 있어, '혹시나'를 대비해 빵을 몇개 샀다.
정확한 지리를 모르기에 근처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내리고 바로 준비해서 출발을 한다.
천도교의 문양은 처음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지금도 '천도교인'들이 있기는 한가?
-- 이 땅에 무슬림도 있으니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단지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뿐일게다.
'용담정'으로 가는 길이 참 좋다.
제법 찬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하늘도 더 없이 깨끗하고, 노란 은행잎이 그 정취를 더해준다.
그래도 '자본'이 쉬고 있는 공간은 없다.
보아하니, 이런 이름으로 지역 특산품화 시켜보려 하였다가 포기한 듯한 분위기인데...
아마 바로 옆 동네의 '청도 한재 미나리'의 위용에 제대로 기도 펴보지 못한 듯하여, 약간 측은해 지기도 하다.
'수운 기념관'이다.
근데 사람은 없다. 그리고 문은 다 닫혀있다.
기념관으로 보다는 '교육 수련관'이란 또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그 후자의 기능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입구에 '포덕문(布德門)'이라는 약간 낯선 문구가 눈에 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자신의 득도 과정을 기록한 글이 바로 '포덕문(布德文)'인데, 그기에서 기인한 듯 하다.
'인내천(人乃天)'이라, 어린 시절 국민(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기차게 들은 단어이다.
공주에 가면 '우금티(치)'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큰 기념탑이 있다.
의외로 박정희 군사 정권 시절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버젖히 내걸고 세운 것이 특이하다.
한반도 역사속에서 모든 민중의 항쟁에 대하여 '난(亂)'이라 하여 그 의미를 축소시키려 하였으나,
오직 하나 그래도 그 의미를 국가에서 살려준 것이 있다면 바로 '동학혁명'이라는 이름이다.
더구나 그 탑에 적힌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는 글자도 박정희의 작품이다.
반(反)봉건 반(反)외세, 그리고 인간 평등의 가치를 걸고 싸웠던 그들 동학교도들.
하지만 대부분 낫이나 죽창등을 들고 우금티를 넘어려는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세계 최초의 기관총인 '개틀링 건'이었다.
1894년 11월 20일 우금치 언덕. 그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대량 '학살의 현장'이었을 뿐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 개틀링 건은 일본의 무기가 아니라, 바로 고종이 구입한 '대한제국 관군'의 무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총에 의해 그 많은 동족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는 왜?
반외세 자주를 외친 동학 농민의 유지를 10월 유신으로 되살려...?? - 말이 안되는 개소리일 뿐이지 않겠는가?
단지 당시 선산지역의 접주로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를 되살리면서,
자신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감추려는 추악하고 야비한 계산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뿐만 아니라 형인 박상희도 항일 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하였었지만
불행히 '10월 항쟁'으로 군경에 의해 학살되면서, 한때 박정희도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암약(?)하기도 하였었다.
물론 여순 사건 이후 발각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동지들을 밀고하여 사형을 면하게 되었으며
이후 만주 관동군 출신 동료들의 비호속에서 군 경력을 이어가게 되었지만,
남로당 활동 경력과 밀고자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쿠데타 이후 더욱 미친듯이 '반공'에 광분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미나리를 키우는 농민이 언급한 그 '용담 약수'이다.
그 넓은 미나리 밭을 다 메꾸기에는 물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ㅎㅎㅎ
하지만 '용담정' 주위의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기에, 사진을 찍는다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이리찍고 저리찍고,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리려 하고, 있을 때도 찍어보고...
그래도 카메라의 한계에 예술적 감각이 빵점인 나의 재능의 한계로 그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역시, 직접 한번 들러 보는 것이 제일 일 게다.
-올해는 늦었지만, 내년에는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이제 '용추각'을 뒤로 하고,
카카오 맵에 그려진 길을 따라 '(구미산)-박달재-어림산'을 따라 걷고 내려오면서 가정리를 둘러 보려고 길을 잡아 본다.
하지만 길이 묵혀져 버렸는지, 아예 없다.
20-30분 진행을 해 보려고 했는데, 너무 길이 없다.
예전 같으면 끝까지 치고 올라갔을 지 모르나, 요즘은... 바로 포기.
편안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와 가정리로 향한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지만 하늘이 너무 맑다.
원래의 목적은 동네 지형은 어떠한지?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인지? 주변은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었지만
용담정을 들른 후 바로 최재우의 생가를 찾으니, 마치 동학을 더듬어 가는 듯한 분위기가 되는 듯 하다.
배호라는 가수를 들어는 본 것 같은데...
누군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아버지가 '대한 광복군 대위' 전역이라...
아마 가난하고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겠구나 했더니, 역시 그러하였다고 한다.
참, 이 땅에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건지...
하루종일 포장된 도로만 걸을 수는 없기에, 어림산 입구를 잡아 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길이 왜 이렇지?'라는 생각으로 더듬어 보니, 여기가 낙동정맥의 일부인 것이 생각났다. 역시...
길을 가도 별 전망은 없고, 시간도 애매하여 어림산 정상 근처에서 묘지를 따라 하산을 하였다.
제법 잘 관리된 '묘지'가 두 구가 보이기에 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젠장...
겨우 겨우 힘들게 내려와 래태리에서 임도를 만났다.
이리 되었으니 그냥 계속 걸어서 다음에 계획하였었던 소현리 마을까지 둘러보았다.
어느듯 해는 질려고 하고, 아파트까지 들어왔지만 택시는 불러도 답이 없고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이제 숙소로...
아~ 배고프다.
집을 구한다? 아니, 집을 하나 지어 보려는 것이 참 어렵긴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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