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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다녀온 이야기

강화 나들길 - 2

저 높은 곳에서 팔을 펼치고 계신 예수의 형상에 이끌려 살짝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차가운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너무도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귀 영화를 기원하는것이 아니리라,

가까운 누군가의 절박함과 애절함을 하소연하고, 오직 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이름만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 절절함이 바라보는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하였으니...

성당을 나와 '고려 궁지'로 올라갔다.

'승평문'을 지나고 나니 '강화 유수부 동헌'이 나왔다.

모형들이 있어 그 시대의 장면을 연출하려는 듯 하였으나, 그 유치함이 차마 여기 옮기기 거시기하여 사진은 없다.

왕실의 주요 문헌을 보관하였다는 '외규장각'은 공사중이었으나,

그 협소한 내부에 그리 중요한 것을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약간 신뢰에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화 향교는 문이 닫혀져 있으며 공사중이라 그냥 지나쳐 간다.

강화 산성으로 들어가려니 약간의 오르막이 나타난다.- 그래 명색이 산성인데, 평지일리는 없을테지...

뭐 그리 가파른 길은 아니다. 조금 올라가면 되는 길이다.

우리는 흔히 산성이라 하면 영화나 TV등에서 보이는 성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의 산성은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약간의 돌을 더 쌓아 놓는 정도로 상상하면 될 것이다.

기중기나 다른 기계도 없는 상태에서,

대부분이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의 지형상 돌을 다루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강화도를 언급하면 자연스레 따라 붙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삼별초'이다.

힘이 없는 조국의 왕조가 몽고에 항복을 결심하자,

이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제주도 등지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 자랑스런 군대?

이상이 군사 독재 시절 우리가 교과서 등에서 배운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길었던 강화 천도 시절 삼별초는 어떤 대몽항쟁을 하였는가?

-- 거의 없다. 몇몇 기록은 있으나 제대로 된 대몽 항쟁을 한 적은 없다는 뜻이다.

'삼별초'는 정식 군대가 아니라, 최씨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직한 사병의 성격을 가지는 군사 조직이다.

그러기에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전투보다는 중앙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하고 향촌 사회를 지배하는데 주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개경 환도와 삼별초 혁파'에 대한 저항에 근거한 반란군일 뿐, 쓸데없는 환상은 접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잎새가 아니라, 마지막 홍시?

근처에 '고인돌' 유적이 있어 잠시 둘러본다.

뭐 별 것은 없었다.

넓은 강화 들판에는 이미 대부분 추수를 끝낸 후였다.

월곶돈대에 도착하였다.

강화해협으로 흘러가는 물길 모양이 제비의 꼬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연미정.

강화 8경으로 뽑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 하지만,

조선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연미정에서 내가 바라본 전경에는 제비의 형상이라고는...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보일지도 모르는 법이라 여기고 자세히 선입견을 가지고 쳐다 봐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경치에 어떤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누구에게라 서슴치 않고 권할만 한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니 말이다.

아마 이 근처가 아닐까?

'조선 공산당'으로 인한 '101인 사건'으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창 나이 34에 서대문 형무소 차디찬 철창 속에서 숨을 거둬야 했던 '박길양'.

그의 시신을 수철리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봄이 되어 강화로 옮기는 배가 닿은 곳이 '월곶 나루'였다고 하니...  

이 땅의 근현대사를 더듬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다.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여기는 김포에 잇는 해병대 2사단이 관리하는 지역이라 그런지,

곳곳이 군대 초소이며 2중으로 되느 철조망으로 경관을 모두 다 망쳐 놓았다.

21세기에 철조망으로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만큼 힘을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화 나들길'을 걸으면서 스탬프를 찍어라는 곳이다.

나느 처음부터 그런 것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니,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뭘 찍어라는 것인지... ㅎㅎㅎ

옛 갑곶 나루터에 있는 또 하나의 순교 성지이고 동시에 갑곶돈대가 위치한 곳이다.

밀려오려는 서양 세력과 뚫리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의 격한 대립이 한 곳에서 충돌하는 양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를 벗어난다면 해 저무는 그 시각의 정경만은 꼭 추천할 만 하다.

강화에 있는 많은 비석을 모아 둔 곳이라 한다.

주로 당시 고을 수령등을 지낸 이들의 선정(善政)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백성들이 만든 것이라???

누가 이 개소리를 그대로 믿을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런 해석을 새기는 그 용기와 뻔뻔함이 대단하다.

그 옆에는 조봉암 선생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니 여기 왜? 강화도가 조봉암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구나.

일제말과 해방 공간등을 관통하는 일본 - 중국 - 모스크바 - 조선의 '대장정'의 끝은,

결국 수많은 지사들이 더러운 친일파에 의해 죽어 나가야 했던 '서대문 형무소' 바로 그 사형장이였다니...

이미 해는 저물고, 배는 고파 오고

어차피 전 구간을 다 걷는 것도 걷을 것도 아니기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로 들어와 '젓국갈비'로 배를 채우고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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