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뉴스에 크리스티나 호날두 아들의 축구 이야기가 나왔었다.
유벤투스 9세 이하 경기에서 23경기 58골 18 어시스트, 그 이후에도 2경기에서 12골을 기록했다고 한다.
'역시 피가 달라'라는 감탄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8-90년대에 맹활약을 하였던 슈퍼 모델 신디 크로포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게다.
그리고 요즘 간혹 같이 등장하는 딸과의 사진을 보면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역시 피가 달라'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하여 살아가는 세상사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피(血)'의 힘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과 집단 간의, 즉 민족이나 국가 또는 인종의 차원에서도 과연 그런 '차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냥 단순하게 외모적인 피부색이나 키 또는 체중의 차이가 아니라,
흔히 우리가 '고유'의 '민족성'이니 '국민성'이니, 아니면 예술적 능력이나 지능등의 차원에서도 말이다.
까딱 잘못하면 비열한 민족 차별주의나 인종주의자가 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할 게다.
이제까지 인종이나 종교 차이로 인한 차별이나 만행은 마치 물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는데,
이제는 이 나라 곳곳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일상의 사건이 되었으니,
그래도 나라가 발전한 결과라고 해석해야 하나, 아니면 '극우 꼴통'들의 또 하나의 'X지랄'로 봐야 하는 건가?
얼마 전 문재인 정권이 공(功)을 들인 결과인지 아랍에미레이트와 한국 간의 300억 달러라는 엄청난 규모의 '한-UAE 투자협력 플랫폼'을 구축 운영한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흥분을 하였었다.
하지만 만약 UAE 관계자들이 '대구시 북구 대현동'을 방문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
여기서 또다시 인종이나 종교에는 되지도 않은 논리로 큰 소리로 떠들고 용감(?)한 듯이 만행을 저지르지만
'돈(자본)' 앞에서는 납작 엎드리는 천민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속성을 보는 듯하여 씁쓸할 뿐이다.
2.
한반도에서는 매번(?) 권력이 바뀌면 극우 꼴통들이 한 번씩 시도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간절하고 애달픈 시도들이다.
이명박 시절에는 '건국절'인지 뭔지로 잠시 시끄러웠고, 박근혜 때는 '국정 교과서'로 잠시 떠들썩하였었다.
그리고 오늘날은 다시 일본과의 배상금 문제로 서로 댓거리를 하며 떠들썩하다.
정통성이 빈약한 권력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어떻게 해서든 메우려는 간절함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이승만 다카키 마사오 그리고 그 딸로 이어져 온 '친일 극우 세력의 정체성'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이성적 논리, 역사적 논증, 시대적 흐름등 그 어디에도 부합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무리나 억지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비논리성 반역사성 반시대성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번 한일회담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에도 또다시 다른 측면에서 같은 내용으로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나 목적의식적 사고나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그 집단이 가지는 내재적 본성, 그리고 간절함 때문이다.
의문이 들기는 한다.
이 정부는 왜 이리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무리하게 이러한 '남의 밭에 대신 거름을 퍼주는' 외교를 하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이 저렇게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서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비슷한 문구들이 있다.
'우리가 얼마나 우둔한 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는지를 알게되면 소름이 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들을 선택한 이 나라 시민들이 감내해야 할 업보가 아니겠는가.
3.
이번 한일외교를 둘러싸고 예전과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어 제기되었다.
-언론들은 참 편한 직업이다. 예전 자료를 뒤져서 대충 반복해서 우려먹으면 되니 말이다.-
바로 일본과 독일의 전후(戰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나 물질적 보상의 관점과 범위등의 차이이다.
여기서 질문은 시작된다.
첫째는 왜 두 민족은, 아니 두 국가는 그런 상반되어 보이는 입장 차이를 가지게 된 것인가?
혹시 그것이 고유의 민족성이나 국민성, 아니 인종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번째 의문이 생겨났다.
만약 민족성이나 인종적 특성의 차이라면,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왜, 어떻게 그들은 전 세계를 전쟁과 학살로 몰아넣은 히틀러와 나치(NAZI)라는 괴물을 '합법적'으로 탄생시켰는가?
양측을 비교할 때는 가능한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이 사리에 맞아 보인다.
하지만 그 동일 선상이라는 것이 단지 시간적 동 시대성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게다.
누구는 조금 늦게, 누구는 조금 일찍의 차이는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제까지 일본과 독일의 비교에서 1945년이라는 깃점을 주로 세웠지만,
'1918년 11월의 독일'과 '1945년 8월의 일본'을 대충 훑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제 이 땅의 모 국무총리는 자기의 대답이 곡해되었다면서
'똑바로 얘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똑바로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모처럼 언성을 올리던데,
소위 기레기들에게는 좋은 핑계가 생긴 건 아닌가 싶다.
'내 기사가 나쁘거나 글을 잘못 쓴 게 문제가 아니라, 단지 너네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근본적 문제이다.'
하지만 내 주제에 감히 그렇게 용기 있게(?) 단언하지는 못하고,
더구나 별 재주 없는 글빨에 글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나 스스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가 있기에 먼저 결론을 내리고 시작하려고 한다.
첫째는 민족적 인종적 차이는 있을 수 없고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다.
둘째는 1918년과 1945년의 독일은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에 1945년의 일본과 각각 따로 비교되어야 할 것이고,
셋째는 양국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은 전후(戰後) 어떤 세력이 정치권력을 틀어쥐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4.
2022년 2월 24일 개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그 끝을 모르고 달리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전쟁에 관한 뉴스는 제대로 읽은 기사가 단 하나도 없다.
머릿 기사들은 검색 중에 간혹 접하게 되지만, 그 내용을 찬찬히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진짜다.
이전 걸프전이나 미국의 이라크를 침공시에 나온 뉴스 중에 제대로 사실을 보도한 기사가 있었던가?
사실 전쟁 중에 나오는 기사는 90%(약간 과장하면 99%) 이상이 가짜 뉴스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게다.
즉, 전장(戰場)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기레기들이 공보실의 발표를 그대로 옮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얼핏 본 머릿 기사들만 종합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에 벌써 궤멸되었어야 하거나,
징병을 거부하는 인민들의 저항에 러시아에는 내란이 일어나거나, 경제 위기로 국가 부도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고, 그러기에 오늘도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1918년 독일의 상황을 잠시 훑어본다.
마지막 전세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독일 군부는 3월과 8월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정적으로 10월 해군에게 내린 자살 특공대나 다름없는 '영국 침공 명령'은 수병들의 반란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이어진 수병과 노동자의 투쟁으로 시작된 11월 혁명으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독일 제국은 결국 막을 내리고 4년에 걸친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역시 결정적인 요인은 세계 최대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참전과 영국 프랑스등 연합군의 지속적인 공세, 그리고 계속된 독일의 무리한 막무가내식 대공세의 실패였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독일 군부와 직간접적으로 참전하였던 독일 국민들은 이에 동의를 하였는가?
원수(元帥)였던 힌덴부르크와 참모장이었던 루덴도르프, 특히 대다수 참전 병사 및 장교들은 이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매일매일 접하는 독일의 승전과 진군 소식, 무너져 괘멸하는 연합군 소식등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더구나 독일 본토에는 여전히 전투기 한 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기에 일반 국민들이 느끼기에도
'분명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왜 갑자기 항복이란 말인가? 이건 배후에 뭔가가 있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패배한 것은 힘이 모자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독일에 유리한(?) 전황을 이끌고 있었는데,
유대인, 반전 사회주의자, 파업 노동자, 탈영병 등이 독일의 등에 칼을 찌른 격이다.'
물론 패전 이후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국은 몰락하고,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 듯하였지만 속 내용은 그러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집단은 바로 '제국 군대 세력'이었다.
더구나 1918년 12월에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만들어진 '프라이코어(Freikorps) -자유 군단'은 막장 폭력 정치의 시발이 되었다.
그들은 '만(卍)'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설치는 전직 장교와 돌격 부대에서 차출된 극히 반동적인 군대로서,
반전(反戰) 세력의 중심이었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총살하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고 다녔었다.
그리고 이들 중 다수는 후일 나치당의 핵심간부로 활약하게 된다.
이후 패전의 최고 책임자 중의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힌데부르크가 77세의 나이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패전의 책임을 국내의 유대인,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반전(反戰) 세력, 파업 노동자들에게 돌리며 군대에 의한 질서 회복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전쟁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5.
간혹 사람들은 1918년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세계적 대공황등이
NAZI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극우 세력이나 군부 세력의 성장 배경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전후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일본에서는 왜 민주 세력보다 극우 세력이 힘을 얻었단 말인가?
일본에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기에, 정당 정치가 발전하지 않았기에?
아니면 일본은 원래가 그런 반동적인 극우 민족이기 때문에?
1941년 12월 8일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면서 일본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1942년의 미드웨이 해전과 과다카날 전투의 패배를 깃점으로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더니
1945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의 패배로 더 이상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일본 본토와 점령지에서 듣는 뉴스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 연전연승하는 용맹스러운 황군의 소식뿐이었다.
간혹 본토에 대한 미공군의 폭격이 수차례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치명적이거나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무라이 정신'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신민들의 사기는 천황을 모시고 '1억 총 옥쇄'도 각오할 정도였다.
하지만 1945년 8월 느닷없는 강력한 폭탄 2발에 모든 전의(戰意)는 상실되고 말았다.-라고 그들은 생각할 게다.-
그들은 지금도 되새기지 않을까?
'우리는 미국에 진 것이 아니라, 원자폭탄에 졌을 뿐이다.'
연합군 점령 기간 동안 일본은 전후처리에서 독일과 비슷한 국제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도쿄 군사재판에서 전범용의자로 체포된 겨우 200여 명의 일본인 중에 사형 7명, 종신금고형 16명, 금고형 2명으로 재판은 종결되고,
더구나 쇼와 일왕은 재판에 회부되지도 추궁 당하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1952년 연합군 점령이 끝나고 주권이 회복되기 이전에 전범 8만여 명은 이전의 군사 정계 정부 조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전후 일시적으로 진보당이나 사회당 출신이 내각총리를 맡기도 하였지만,
1955년 정치 통합으로 '자유민주당'이 결성된 이후로는 짧은 기간을 빼고는 오늘날까지 자민당의 독주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 자민당 소속 의원들의 대부분은 전직 관료(전범)이거나 기업인 출신인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구나 전후 세대 출신의 역대 총리의 가문을 보면,
역시 대부분이 제국주의 시대에 나름 혁혁한 공을 세운 '전범 가문'이 주(主)를 이룸을 알 수 있다.
6.
흔히 '정치'를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정치를 이해하려고 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20대의 미인이고 멀쩡한 젊고 나름 똑똑한 여자가 왜 그 'JMS'등에 빠져서 그 난리를 떨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나름 멀쩡해 보이는 늙은이들이 지금도 다카키 마사오와 그 딸에게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보면,
종교에 미쳐버린 그 어린 여자들-'아가 동산'등에 얽힌 늙은이들도 포함하여-이 조금씩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정치적 제반 문제를 폭력을 통해 일시에 해결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전쟁'을 이성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더구나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제 세력들의 관계를 실타래처럼 제대로 풀어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이해를 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로고스(logos)적 이해'와 '파토스(pathos)적 이해'라 하면 말이 되겠는가?
머리로 논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측면과 가슴으로 감정적으로 동조하며 이해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이 둘을 합친 '전일적(全一的, holistic)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에토스(ethos)적 이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기에 따로 이름을 붙여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정치, 종교 그리고 전쟁을 완전히 이해하는 키워드로 '광기'를 언급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 개인들의 삶에서 '광기'를 직접 접하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병원 응급실등에서 간혹 보기는 하지만, 다른 환자군에 비해서 흔하다고 할 수는 없는 정도이다.
하지만, 대낮에 버젓이 자행되는 '집단적 광기'는 심심찮게 목도되고는 한다.
대낮 대로에서 화염 방사기를 들고서 가스통을 굴리는 이들,
낮술에 취한 건지 얼굴이 뻘게져서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고함을 치는 사람들,
우리가 TV 등으로 자주 보는 그들도 혼자 있거나 집에 들어가면 너무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것들을 소위 이성 합리성 도덕적 가치등의 고상한 단어로 이해하거나 해석하려 할 때 머리가 깨지는 듯할 게다.
광기는 광기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되어야만 제대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전쟁이라는 비극을 전후하여서는 더욱 말이다.
7.
1945년 드레스덴이 연합군의 집중적인 공중 폭격에 의해 처참하게 개박살 나는 것을 보고,
독일인들은 비로소 그들이 지금 어떠한 현실에 처한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지난 몇 년간 무슨 짓을 벌였었는가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깨우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물론 괴벨스는 드레스덴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 연합군의 제네바 협정 위반을 들먹이며 선전에 이용했지만 말이다.
-어찌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하기는 이 땅에서도 오늘날 장관직에서 열심히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이의 뻔뻔스러움도 있으니...-
1945년 4월 30일 결국 히틀러가 그다음 날에는 괴벨스가 자살하고, 5월에 연합군과 소련에 항복을 선언하고.
그제야 비로소 독일인들은 그 '광기'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게 되지 않았을까?
나라는 동서로 찢기 우면서 '냉전(Cold War)'이라는 새로운 국제 정치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되면서,
패전으로 국토의 1/4을 잃게 되고, 9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옛 영토에서 추방되어 본토로 들어오게 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히틀러 시대에 자행되었던 천인공노할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의 실체가 하나씩 공개되면서,
옛날 영광을 누리던 자들은 뉘른베르크의 법정에서 역사의 처벌을 받게 되면서...
1918년 정국의 안정과 주도권이라는 양날의 검을 쥐기 위하여,
여전히 강력하고 인기 있어 보이는 군부를 이용하려는 쉽고 얄팍한 길을 가려다 개박살이 있던 정치권은
콘라트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집권기를 이어가면서 새로운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시절이 무조건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1920-30년대의 독일 정치와는 확연히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잔존 극우 세력'등의 반발이 있기는 하였지만,
전 세계적 호황인 '황금시대'에 부응하여 체제는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기에 이르렀고,
그 시기에는 모진 '광기'가 한번 지나간 그 자리에 또 한 번의 광기가 휘몰아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물론 오늘날을 지나는 이 시점에서는 어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8.
비록 패전국이라는 멍에를 쓰기는 하였지만, 이미 탄탄한 과학기술을 가진 일본에게 있어
전후 세계적 호황을 누리는 '황금시대'는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너무도 적당한 시기에 터져 준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달리는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비록 새로운 헌법상 제대로 된 자체적 군대를 가질 수는 없지만 그게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군비를 아껴 경제 발전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천황'은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지배자들은 일시적으로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이제는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정치권은 그들-전범 또는 준전범 출신, 기업인, 엣 관료들-이 주도권을 쥔'자유민주당'으로 통합하여
소위 '자민 막부'로서 안정적인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정치 경제의 영역만이 아니다.
사회, 문화, 예술등의 모든 영역에서 그들이 그리도 주창(主唱)하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가 현실화되는 듯하다.
이제 불운하게 전쟁에서 패배한 세대는 비록 사라져 갔지만, 그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이어받을 자세가 충분히 되어 있다.
즉 그들에게 과거는 분명 불행한 역사이지만, 그들이 극복해야만 하는, 그것도 그들의 방식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하지만 더 이상 비굴하거나 초라하지 않게, 오늘의 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맞서 나가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직접적인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역사이기에,
이제 그 자손으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들의 얼굴에 더 이상 치욕이나 먹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정책적 탄력성은 가질 수밖에 없다.
여전히 강한 자에게는 불가피하게 일부 양보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강하게 나갈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만만하게 보이는 경우에는 조상에게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9.
1970년 12월 차가운 초겨울비가 내리는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정작 나치 독일에 저항하며 망명을 하며 반나치 전선에 섰던,
그러기에 어찌 보면 아무런 죄가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의 현장에서 진심 어린 사죄를 하였던 것이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독일의 대통령인 슈타인마이어는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금 그 진심 어린 사죄를 되살렸다.
2021년 12월 8일 일본 여야 의원 99명은 야스쿠니 신사에 집단 참배를 하였다.
하필이면 그날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딱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집권기에는 직접적인 참배는 하지 않고 공물만 보냈던 아베 전 총리는 퇴임 후 직접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이때만이 아니라 야스쿠니에 대한 일본 정치인의 참배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거나, 정당성에 대한 논쟁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마치 이 땅에서의 반공 논리처럼, 자연스레 당연시되어 이루어지는 '일본식 사상 검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매번 새삼스럽게 다짐하는지도 모른다.
'영광스러운 옛날을 되살려야 하기에, 결코 과거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이 두 장면을 단순 비교하면 사죄하는 독일과 뻔뻔스러운 일본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의 독일은 분명 1970년의 독일과는 너무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역시 가장 큰 차이는 '누가 정치권력을 쥐었느냐?'이다.
이것은 일본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도 전후(戰後) 좀 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세력이 권력을 쥐었다면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게다.
10.
한 국가가 크나큰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데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1918년 독일에서 보았듯이, 정상적인 길을 벗어나 조금 쉬워 보이는 얄팍한 길을 선택하였을 때,
그 이후 전 국민이 치러야만 하는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현주소에서도 그 대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뒤처진 이 땅의 극우들의 난리가 더 심각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근거도 없으면서 비열하기까지 한 민족적 특성이나 인종적 차이를 가지고 뭐라 언급하지는 말자.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서로가 너무 초라하거나 쪽 팔리지는 말아야겠지.-
더구나 만약 그 논리대로라면 아직도 '배상하라고 악이나 쓰고 있는' 이 땅의 민족성부터 언급해야 할 테니 말이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대로 된 정치권력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낡은 권력을 쓸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문득 우울해지는 생각.
--- 이 땅에 다시 한번 더 제대로 된 기회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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