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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좀 진지하게 생각한 이야기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이유?

1.
일반인들이 죽음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다.
그러기에 대부분이 TV나 소설 등에 근거한 허구적 장치들에 개인적 상상이 더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게다.
과연 사람들은 죽기 전에 스스로의 죽음을 알고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일까?
글쎄, 명확한 답변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No'에 방점을 두고 싶다.
암 말기이거나 100세를 넘은 이들도  의식이 있을 때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간혹 힘없는 목소리로 '내년에도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말을 던지기는 하지만,
그들은 내년의 봄을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준비하려 한다.
마치 당연한 일이나 순서인 것처럼...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 많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름 전후면 누구나 완주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길을 마친 다음 다시금 그 길을 종이 위에 그릴 수 있겠는가?
지도 위가 아니라, 그냥 하얀 종이 위에 말이다.
즉, 스스로가 걸었던 그 길을 지도로 그릴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지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나 기억등으로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고 담겨진 풍경들을 나름 묘사하고 그리는 것 말고.
주변의 산과 강 그리고 하천들, 힘들게 오르고 내려갔던 그 길의 대충의 높낮이,
때로는 직진으로 때로는 완마나하게 또는 급하게 꺾으며 새로운 풍경에 감탄하며 걸었던 그 길들을 말이다.
그래, 한 번으로는 분명 무리가 있을 테니 세 번 네 번 다녀오면 대충의 지도라도 그릴 수 있을까?
 
2.
'씬 레드 라인'이라는 전쟁 영화가 있다.
미국의 1942년 과달카날 전투를 배경으로 한 뻔한 내용의 작품이다.
하지만 화면의 영상은 그리 뻔하지 않다.
병사의 시선 높이에서 처리한 영상은 그 많은 전쟁 영화 중에서 유독 나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영화의 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사령관(소령? 대령?)은 전투 중인 소위에게 무전으로 무조건적인 공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소위는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명령을 어기고 다른 루트로의 공격을 시도하여 결국 승리하게 된다.
-솔직히 정확한 내용은 그리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전투에 승리하게 되자, 사령관은 통 크게 웃으며 그 소위를 칭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뭐, 훈훈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연의 삼국지'에서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총애하였던 '마속'을 보낸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가정에 가면 산 밑에 진을 치라고 하였으나, 현장에 도착한 마속은 산 정상에 진을 치게 된다.
하지만 위군(魏軍)에 포위되어 물량 부족등으로 대패를 당하게 되면서 공명의 1차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제갈량은 엄격한 군율을 지키기 위해 마속의 목을 베게 된다.- 읍참마속(泣斬馬謖) -
 
참으로 상반되는 두 이야기이다.
손무(孫武)가 말하기로 '장재군 군명유소불수(將在軍 君命有所不受)'라 하여 
장군이 군문에 있을 때는 왕의 명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즉, 왕(총사령관)이 믿고 보낸 사람이라면 그의 현장 판단에 대하여 최대한 자율권을 줘야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마속(馬謖)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국력을 소모한 대 원정(遠征)의 실패에 대하여 그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마속의 자율권은 인정하나, 지휘관은 그 결과에 대하여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제갈량은 스스로에게도 직급을 두세 단계 강등하는 처벌을 내리게 된다.
 
9개월 전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의 젊은이가 졸지에 죽어나가도,
9년 전 300여 명의 어린 학생과 시민들이 허망하게 죽어 나가도,
그 누구 하나 책임지거나 처벌받지 않고 잘들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겠지만...
아~ 천안함에서 모든 병사들이 빠져 죽을 때 혼자 살자고 도망친 함장은 어느 날 영웅이 되어 있기도 하구나.
 
갑자기 힘이 쭉~ 빠지지만 그래도 글을 이어가 보자.
 
3.
몇 번 관심 있게 보다가 최근에는 철저히 외면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욕 들어 먹을지 모르겠지만,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 퀴즈...'라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포맷에서 그리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하자,
코로나를 계기로 이제는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를 초대하는 포맷으로 바꾸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장미란이라는 과거 역도 선수가 출연한다기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외모 차별주의자'가 맞다.
좀 못생긴 사람이 나오는 프로그램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집중도 안되고... 솔직히 그렇다.
더구나 최근 그 프로 자체를 외면하는 편이기에 당연히(?) 장미란 출연 편은 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 장미란이 많이 변했을까? 역시 유 퀴즈의 이런 면이 인기의 비결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갑자기 뉴스에 나오는 소식 하나.
'장미란. 문화 체육부 2 차관으로 임명'
--- '아~ 그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유재석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가 이미 알고 했겠는가,
출연자를 선정 교섭하고 내용을 편성하는 제작진이나 경영진의 의도를 따라가야지 어쩌겠느냐?'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미 차관으로 내정되어 있다가 출연한 것인지, 출연을 계기로 차관으로 발탁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주장과 겹쳐지는 듯한 기분이라 결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물론 나도 착해 보이는 유재석을 나름 좋아하기에  더 이상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 하지만 TV 한번 출연했다고 어떻게 차관을 시켜주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점쟁이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극우 유튜버가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는 이 정권에서 무슨 일인들 의아하겠는가? --
 
4.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이유'라는 황당한 제목을 어떻게 고칠까 생각을 해보지만 별다르게 뚜렷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얼핏 생각해도 어찌 그 이유가 한두 가지로 정리가 되겠는가?
그리고 그 황당하면서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뭘 안다고 이리저리 떠들 수 있겠는가?
나도 어느 정도는 내 주제를 알고 있기에 뭐 대단한 내용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5.
우리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즉,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결코 그 전체의 그림-지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걷고 있는 살아가는 이 삶이, 내 인생의 그리고 이 사회에서 나아가 긴 역사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느 정도의 고도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바다와는 얼마나 멀어졌는지, 주위에 샘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내가 위치하고 존재하는 지극히 짧고 좁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이외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그것 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오직 상상과 희망이라는 괴물의 놀음에 내 맡겨진 채 말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 전략이다.
지휘관은 그 전체를 바라보고 일부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전체의 승리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적의 눈에 드러난 작은 한 소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공격이 기획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씬 레드 라인'에서 그 소위의 판단은 소대원 몇 십 명의 목숨은 구했을지 모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과달카날 전투 전체를 망쳐 버리는 우(愚)를 범했을 수도 있는 위험 천만한 판단이요 처신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현실적으로 판단하자면 당연히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6.
물론 전체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미천한 나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그들이나 똑같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자위하기에는 솔직히 그 내용이나 차원이 다르지 않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의지로 보다 능동적 작업을 수행해 나간다면,
그에 비하면 우리는 마치 무의미하게 맷돌에 갈리는 콩처럼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휩쓸려가며 찢기고 부서지기 일쑤이지 않은가.
제1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는 장면들.
그 진창 참호 속에서 쓰레기처럼 숨만 쉬고 있다가 '돌격!'이라는 명령에 죽는 건지 사는 건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그 수많은 병사들처럼.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버팀목으로 사람들은 '희망'을 말하곤 한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프로메테우스에게 그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린 제우스.
그런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내려 준 '아름다운 여인 판도라와 상자'라...
이 세상의 모든 만악(萬惡)의 근원들이 담겨있었던 그 상자에, 어찌 선의의 선물이 하나라도 남아있을 것이라 기대한단 말인가?
제우스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그 '희망'이라는 괴물이 아직 상자 안에 갇혀있기에
우리는 좀 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판단하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겨나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시금 그 상자가 열리고 '희망'이 설치고 난무하기 시작한다면,
중세 시대의 암흑기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를 게다.
모두가 교회나 절, 또는 무당집이나 점쟁이에 달려가서 그 썩은 '희망'만 붙들고 살아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7.
'무지가 인간에게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살아갈수록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더욱더 절실하게 와닿는 맑스의 표현이다.
그렇다. 알지 못한다는 것.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와닿는 그 이유이다.
 
어느 앉은 뱅이가 눈먼 봉사의 등짐에 얹힌 채 서로 힘겹게 길을 찾아 나갔다는데,
우리는 마치 눈 먼 봉사 몇몇이 서로의 길이 맞다고 우기다 진흙창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양상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