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역사에 대해서는 은근히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생겼다.
간혹 관심 가는 분야가 있어 자료를 찾고 뒤져 보다 보면 너무 가슴 아프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이다.
'역사란 참 모질고 잔인한 사람들이 공부하는 분야이구나'라는 느낌과 함께.
차마 그냥 묻어 버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역사'라는 주제에 가진 흥미를 버리지는 못하기에 은근슬쩍 남의 이야기를 기웃거려 본다.
'어디 우리만 아프겠나? 남의 고통은 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 너무 얄팍하지만...-'
하지만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그냥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
그것도 그냥 그렇게 쉬운 게 아니구나 싶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의 나치 협력자들은 많은 경우 그리스 주민들을 독일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내용이 아닌가?
바로 1945년 미군정기 시절 친일파를 옹호하고 나아가 그들을 경찰 군대 및 관리로 재등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 위의 발언은 다름 아닌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의 발언이었다.
사회 혁명보다는 파시즘을 지지하겠다고 공언하곤 하였던 그는 영국 군대를 그리스로 파견하여
1944년 12월 '그리스 해방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아테네를 폭격하게 된다.
다름 아니라 독일군이 후퇴하고 난 이후 그리스인들이 살아가는 그 아테네를 말이다.
독일 나치의 지배하에 놓인 그리스에서는 자연스레 반(反) 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은 그리스 공산당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정치 운동인 EAM이며,
그리고 그 산하 군사 조직인 ELAS는 당연히 주도적인 레지스탕스 중심부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치열하고 단단한 대오를 유지한 ELAS는 그 어떠한 연합군의 실질적인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 본토의 4/5를 해방시키는 등의 혁혁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어느덧 전세는 연합국의 확고한 우세 속에서 마지막 결정적 몇몇 전투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에 대한 지속적인 제국주의적 지배를 원하는 처칠에게 이들 EAM/ELAS은 눈엣 가시가 된다.
여기에서 처칠은 다시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다.
레지스탕스 군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그들 영국군에게 순종하는 극우 성향의 신성중대와 산악 여단만이 아니라
나치 점령기 시절 '나는 독일군 최고 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것임을 신께 성스럽게 맹세'한
'보안대대' 소속 요원들을 대거 고용하여 직접적으로 작전에 투입하였던 것이다.
- 갑자기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역사의 장면들이 이어진다.-
결정적 기회가 오자 처칠은 '그리스의 질서를 위협하는 레지스탕스 반역자들(?)'에게 대포, 함포, 비행기, 로켓등으로 무차별적 폭격을 시작한다.
1944년 12월 3일 처음 24시간 동안 아테네 주거지역에 2500발의 포탄을 발사하여 13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후 지속적인 공격으로 5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사망하면서 작전은 끝을 맺게 된다.
이후 자연스럽게 권력을 잡은 극우 세력은 선거 조작, 부정부패, 테러리즘, 암살등의
그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을 마음껏 동원하며 나라를 유린하게 되고.
당연히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또 하나의 장면이 연출되게 된다.
나치에 저항한 이들은 모두 처벌을 받게 되고, 나치의 협력자들은 보상을 받게 되는 장면들.
당시 그리스 주재 미군의 단장이었던 밴 플리트는 한국전쟁 시기에 미 8군 사령관으로,
그리스 내전 당시 자신이 지휘했던 그리스 군대 장교들을 이끌고서 부임하게 된다.
과연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그리스 내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미점령군은
물 설고 낯 선 한반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처칠에게서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을게다.
그러기에 조선 민족의 자주적 독립 보다는 '대소반공(對蘇反共) 전선 구축'이 급선무였던 미군정은
자연스레 한민당이나 서북 청년단 같은 극우 세력, 백선엽을 위시하여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 특설대 출신 군부 세력 그리고 친일 부일의 경찰 및 행정 관료 세력들을 싸고 돌게 된다.
그리고 그 모순이 집약되어 터져 나온 '제주 4.3'을 보면서 그들은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았을까?
'동양의 그리스'로서 말이다.
예전 딸과 '진로 문제'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아버지가 원하였던 의사로서의 길이 아니라, 어릴 때 희망이었던 '역사학자'가 되었다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경제적으로는 지금보다는 약간 불편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만족도는 더 높지 않았을까?
나름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관계되는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는 등등.
그러기에 딸에게 진정 네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빼먹은 듯하다.
만약 내가 소원대로 '역사학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학자는 되지 못하였을 게고,
그러기에 삶의 만족도도 그리 높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잔인한 역사, 피 비린내 나는 역사, 칼로 베는 듯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내가 어찌 부딪히고 감당하고 극복하며 찾아가고 구축해 나간다는 말인가.
역시 나는 지금처럼 대충 사는 게 제일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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