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볍게 시작하려는 것이 너무 무리가 되어 버릴 것이 자명하다.
결국 또 하나의 제대로 끝 마치지 못할 글이 될 것이 뻔해 보이기 때문일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을 내게 될까?
아마도 아주 어리버리한 지점이 될 것이다. 죽도 밥도 아닌 그 어딘가.
그래도 한번 시작해 보자.
노니 장독도 깬다는데, 이 정도야 뭐가 문제이겠는가.
2.
이런저런 나름 각자의 다양한 사연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 시대.
그러면 언제는 살기 쉬웠던 시대도 있었는가?
흔히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좋았는데...'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때 뒤에서 은근히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 '에구 저 꼰대...'
매 번 매 순간 평범한 우리나 비범한 그들에게나 누구나 살기 힘든 시대 임에는 매 한 가지라는 데는 차별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 나름 새로운 세상을 꿈꾸곤 한다.
그리고 각각 나름의 다양한 이상향들의 그림들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지곤 한다.
바로 정치나 종교의 다양한 얼굴과 이름등으로 말이다.
3.
1990년대에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에서 발견된 '괴베클리테페 유적'은
이제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당연히 그러리라 여겼던 보편적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기원전 9000년, 즉 수렵 채집의 중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그 거대한 신전 유적지는,
인간이 농경등의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이어서 신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의외로 종교적 믿음에 기초하여 먼저 신전을 만들고-그 당시 최대 150km의 거리를 가지고-,
그에 기초하여 널리 분산된 각 종족들이 나름의 수렵 채집등의 기초적인 생활 및 질서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농경 생활로 각 부족들이 나름의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괴베클리테페 유적은 그냥 묻혀버리게 되었다.
인간이 종교에 대하여 가지는 그 깊고 깊은 믿음은 우리의 보편적인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 아니 '우리'라는 표현은 잘못이다. '나 같은 반종교주의자'가 더 정확하다.
10000년 전 그 먼 길-최대 반경이 150km 정도였다고 한다.-을 오직 두 다리만을 이용하여
수렵 채집한 음식물을 챙겨 길거리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며,
더구나 신전에 도착하여서는 오직 돌과 사람의 힘만으로 그 거대한 석조 구조물을 깎고 다듬고 옮긴다?
도저히 상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 같은 이의 머리로는 말이다.
4.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였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또 하나 있기도 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왜 오늘도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재용이 힘들까 봐 걱정하는 것은 무슨 심리인가?'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이라는 너무도 기본적인 도식에서 어긋나도
이렇게 매번 어긋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언급한 표현 하나를 옮기고 싶다.
'내 부모를 죽인 자는 어쩌면 용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사유재산을 건드린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 강조를 위해 약간의 의역을 넣어서-
나는 이 말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치관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러할지라도, 그것이 정치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에는 전혀 다른 뇌 기능이 작동하는 듯하다.
작은 차이라면, 가진 자들의 행태는 당연히 여겨지고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그들은 주저 없이 그들의 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도덕적 의무감이나 진보적 지향성이 개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늙고 가난한 이들이 쓸데없는 일로 광분하여 자신의 이익을 발로 차버리는 꼴을 보자면,
도저히 그 근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5.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쉽게 '언론'이나 '교육'을 언급하곤 한다.
2016년 '트럼프 Vs 힐러리'의 미국 대선은 '언론-뉴스'라는 측면에서 많은 논쟁 거리를 제공하였다.
이후에 사람들은 '개소리(Bullshits)'와 '가짜 뉴스'에 대하여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질 정도이니 말이다.
물론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가에 대해서는
단지 2016년 미국 대선의 결과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를 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거대 언론을 쥐고 있는 세력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나 쉬이 시민들의 뇌를 스펀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었으니 밀이다.
무솔리니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의 특수성? 그러면 독일은?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퇴임 후 가장 후회하는 일이 바로
'언론 규제법'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이라 한탄하는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1914년 프랑스 '르 피가로'의 편집장을 총을 쏘아 죽이고도 무죄를 선고받은 카요 부인의 말이 깊게 들린다.
'뉴스 편집자를 총으로 쏘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언론이 발전할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쓰레기 언론의 개지랄-요즘은 얘들만 생각하면 표현이 너무 거칠어진다. 이것도 분노 조절 장애인가?-이
이 땅 대한민국에서도 예외 일 수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언론'의 문제만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언론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고귀하다고 스스로를 칭송하는 인간이
이렇게 쉽게 휘둘린다는 것도 어쩐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 인간이 생각만큼 그리 대단하지 만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그만?
6.
사람이 가장 용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영화나 TV를 보다 보면 칼이나 총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과연 실제로 저렇게 싸웠을까? 엄청 무서웠을 텐데 말이다.
완전히 술이나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나,
아니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순간
인간은 그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보일 수 있다.
영화 '라쇼몽'에서 노인의 시각에서 보여준 산적과 사무라이와의 어리바리한 진검(眞劍) 대결.
이것이 칼과 계급이라는 보호막 속 가식에만 젖어있던 사무라이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특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던 예수는
결국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노정하게 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 참 곱씹을수록 멋진 대사이다.
7.
막연히 종교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하다 보면
사랑, 믿음, 박애, 자비, 평화, 천국, 지옥, 천사, 등등의 단어들이 먼저 연상되곤 한다.
그러면서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들이 상징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공통점을 갖는 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온순하고 도덕적인 가르침만으로
그 수 천년의 세월을 수많은 사람들 위에 그리도 엄청난 힘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아즈텍이나 그 밖의 많은 고대 신전에서 그리도 많은 이들이 인신 공양으로 목숨을 잃어야만 하였고,
굳건한 교회를 세운다는 명목하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을 바쳐야만 하였고,
단지 예수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나아가 거의 인종 청소(제노사이드)를 당해야만 했던 중남미 원주민들,
불에 태워지고, 창과 칼에 찔리고 목 베이고, 물에 빠지거나 삶아지고, 고문으로 사지가 부러지고 뒤틀리고...
종교가 그리도 인간들의 마음속 깊이깊이 뿌리 박히게 끔 된 그 근원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하나를 뽑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공포심 - 두려움'을 내세울 것이다.
신에게서 가장 잘 실하게, 간절하게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것은 자신이 위기에 처한 상황, 즉 무엇인가로 인한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이다.
편안한 시기에는 간혹 신들에게 복(福)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보다는 자신의 삶에 해(害)가 없기를, 자식들의 앞길에 장애가 없기를 바란다.
어쩌면 신들은 내 삶 속에 개입하여 함께 하기보다는
내 삶의 주위에 머물면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그 무엇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 주기만을 바라는 존재이다.
그러면 왜 신들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홀연히 나타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착한 인간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일까?
신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일회성으로 한번 나타나 정리를 한다고 하여 세상은 영원히 깨끗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여러 번 나타난다면 인간들도 간이 부어서 말을 듣지 않을 것을.
그러기에 바로 그 '두려움-공포'를 유지하며 지속하는 것이 가장 유용한 방안이라 여겼을게다.
8.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가벼운 마음으로 집 앞산을 올라간다.
그리 험한 길도 아니기에, 자주 다니던 길이기에, 곧 해가 뜰 것이기에 렌턴도 없이 길을 잡았다.
조금씩 깊이 들어 갈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발걸음은 더욱 주춤거려지고,
주위의 바람 소리나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머리칼이 쭈볏쭈볏 해진다.
마음을 추스르며 천천히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여명이 밝아져 오면서 주위의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도 익숙한 나무와 풀들 그리고 길의 흔적들.
순간 나의 나약함에, 그 하찮은 두려움의 원인들에 대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아니, 내가 이런 것들에 그렇게...'
흔히 몇몇 선각자적 인물에 대해 시대의 횃불이니 하는 표현을 쓰곤 한다.
완전히 어두운 절망만이 보이는 그 시대에 저 멀리서 나마 어슴프레 비춰주는 그 작은 횃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쉬이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빛'이란 그런 것일 게다.
단지 어두움을 몰아내 주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두려움을 물리쳐 주는 '무기'로서 말이다.
9.
내가 가졌던 기본적인 도식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즉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진영이 결정된다는 이 단순한 논리가 과연 맞는 것인가?
얼핏 보면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보이는 많은 실체-현실-들이 그 논리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분명 틀렸거나 수정을 요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산업 혁명이 그 절정을 누리던 시기, 모든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곤 하였다.
그러기에 '인문 과학'이니 '사회 과학'이니 하는 학문까지 출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정치나 철학의 세계에서도 '과학적 사고'가 위세를 떨칠 수밖에 없었다.
격변의 시대와 위대한 천재의 조우가 이루어지는 그 지점에서 출현한 '과학적 사회 구성체 이론'
분명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철학 등 전반에 걸친 인식의 대혁명이요 대 전환점이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는 부분적인 오류들을 안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치료법이나 논리에 오류와 잘못이 있다고 하여,
과연 오늘날 그의 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는가?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황당한 믿음은 그 격동의 시기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는 오늘날에도 쉬이 뛰어넘지 못하는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니,
그 시대에 그 단어들이 뿜어내는 내공이 어떠하였을지는 쉬이 상상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과연 그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가?
스스로 주체적인 사고를 하는 능동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인가, (사회 속에서 시대 속에서) 생각되는 존재인가?
10.
스탈린 1919 ~ 1951, 무솔리니 1922 ~ 1943, 히틀러 1930 ~ 1945
피노체트 1973(1974) ~ 1990, 프랑코 1936 ~ 1975, 박정희 1961(1962) ~ 1979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역사에 남는 악명 높은 독재자이면서, 동시에 나름 장기 집권에 성공한 인물들이다.
더욱 문제는 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천재'니 '영웅'이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깊이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하나의 유령처럼' 각 나라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와 강도의 차이는 가지고 있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정치적 문화적 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역으로 그 심한 정도가 그 나라의 정치 문화적 수준의 반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그들의 공통점은,
체카에서 출발한 KGB, SS 친위대, 안기부등의 다양한 합법, 반합법 조직을 운영하며
시민들에게 항시적이고 잠재적인 '두려움-공포'를 조장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게 하였다는 것이다.
'무기를 든 예언자는 모두 성공한 반면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했다.'
아~ 그래서 트로츠키, 아옌데 등은 그렇게도 비참하고 무참하게 무너져 버렸었구나.
11.
통상적으로 종교는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분야로 여겨진다.
하지만 종교에 열심인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부합되는 합리적인 분야로 받아들인다.
-- 이것을 '라쇼몽의 법칙(?)'이라 이름을 붙여볼까?
정치와 종교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그 '두려움-공포'가 아닌가 싶다.
세계사에서 신정일치의 시대를 뛰어넘은 지 근 500년이 지난 지금
-물론 이란등의 극소수 국가에서는 아직 살아있지만-
정치와 종교는 엄연히 구분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그 근저에 깔린 군중 심리로서의 작용 기전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그 비과학성, 몰가치성, 맹목성등에서는 더욱 강력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의 이익을 챙기려는 하이에나들의 뻘 짓거리도 한층 더 할터이고 말이다.
어제처럼 비 내리는 길거리에 '유령'을 쫓아 배회하는 늙은이들의 그 뜨거운 열정.
정치적 선택은 결코 경제적 과학적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 종교적 믿음의 세계로 해석하려 할 때,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 대상이 신일 수 있고, 아니면 '반인반신'이라 믿는 존재일 수도 있고...
12.
나쁜 예감은 대부분 너무도 정확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한계를 너무도 깊이 절감하게 한 이 쓸데없는 놀이도 이제 마쳐야겠다.
역시 어리바리한 말도 안 되는 지점에서 대충 마무리하고 끝을 낸다.
'주제를 잘못 잡았어...'라고 위로하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드는 환청 한 마디 -- '그래 니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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