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늦게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하였다.
고도 1900m 정도 되니 저녁을 먹고 나서는 TV나 다른 문명기기가 없는 방에서 혼자 별로 할 일은 없고,
간단히 빨래를 하고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일찍 깨어날 수 밖에 없다.
여명을 따라 군데군데 맑은 하늘이 보이는 듯도 하여 새삼 오늘의 일정에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밝은 해가 뜬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지난 3일간의 우중(雨中) 설중(雪中) 산행에 비하면 감지덕지할 정도이지 않겠는가.
아침을 단단히 챙겨 먹고, 점심까지 가방에 챙기고 기대를 가지고서 또 하루를 시작한다.
숙소를 나서는 순간, '우와 ~ 이래서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때는 미처 오후의 고난을 예상하지 못했으니...
그래도 일단은 경치와 날씨가 죽여준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또 다시 너무도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진다.
나이 든 사람 두 명이서 아침부터 낚시 도구를 챙겨 와서 판을 펼치고 있다.
'참 무슨 복을 타고 났기에...'
왼쪽으로는 제법 짙은 구름과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만, 그래도 간혹 보여주는 경치가 걸음을 멈추게 할 뿐이다.
하지만 왼쪽의 정경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ㅎㅎㅎ
안내판에는 여기 보이는 호수가 제법 유명한 곳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위스의 트레킹 길은 그 길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오늘 내가 가려는 길과 겹쳐지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제부터 오늘의 고난이 시작된다.
최고점을 찍었기에 앞으로는 대부분이 내리막 길이지만, 결코 그냥 평범한 길이 아니었다.
물론 눈만 내리지 않았다면 너무도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이었을 테지만,
오늘은 중간중간 지난 밤의 눈사태로 추정되는 눈 구덩이들로 인하여,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길을 약 1시간가량 따라가는 게 여간 위험하고 힘들지 않은게 아니었다.
불현듯 저 멀리 마모트 2 마리가 먹이를 찾아 다니는게 보인다.
신기하다.
짙은 구름과 안개로 아무것도 안보이는 듯하였지만,
우울하게 걸어가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간혹 선명한 경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발걸음은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역시 이런 날에는 사람들도 없다.
맞은편에서 오는 내 또래의 부부 한팀을 만났을 뿐이었다.
서로 조심하라고 격려를 하면서.
1 시간 가량을 힘겹게 눈덮힌 능선을 지나고 나니 이제 눈은 제법 녹고 길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여기가 안내로는 굉장한 전망이 펼쳐지는 곳인데...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안보인다.
한참을 내려오니, 높은 산 정상에는 여전히 구름이 덮고 있지만 밑은 너무도 맑은 날이다.
Meiringen이라는 마을에 도착을 하였다.
스위스의 마을이 다 그렇듯이 2000~3000m를 넘는 험준한 산들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리 크지는 않다.
여기도 인구 5000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우리나라의 자그마한 읍내 정도?
하지만 여기는 관광 도시로 각광을 받는 곳이기에, 편의 시설이나 식당 마트등은 너무도 깔끔하고 격조가 있다.
특히 '머랭'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주장하고, 그러기에 몇몇 머랭을 파는 가게도 있다.
뭔지 잘 몰라 사 먹지는 않았지만...
조그마한 영화관이 이채로웠다.
하룻밤 묵은 B & B 숙소이다.
여기는 또 하나 셜록 홈스와 연관된 이야기로 유명하다.
소설 속 셜록 홈스가 모리아티 교수와 싸우다 떨어져 죽는 장면의 배경인 '라이헨바흐 폭포'가 여기에 있다.
물론 다음 편에서는 죽은 셜록 홈스가 다시 살아 나지만... ㅎㅎㅎ -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
중요한 것은 그러기에 '셜록 홈즈 박물관'이 여기에 있다.
물론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식당에서 가볍게 맥주 한잔에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숙소로 들어간다.
역시 별로 할 일이 없기에 잠자리에 들어간다.
이상하게 금방 잠이 잘 든다. - 여기서는 불면증으로 조금 고생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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