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소설의 성공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영원한 제국'의 저자 이인화의 첫 데뷔작이다.
아마 '이인화'라고 하면 낯설지 모르지만 '류철균'이라 하면 조금 낯이 익으려나?
하지만 지금 30년 전에 읽었던 소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 제목이 떠오르곤 하였다.
즉 '나(我)'라는 존재 안에 '강렬도=0'로 무수하게 혼효되어 존재하는 '나(我)들'
지금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자극에 의해 욕망의 흐름이 표출될 때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탈주선 (linge de fuite)을 만들어 튀어나와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기게 '기관없는 신체'는 실질적으로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강렬도'가 자유로운 흐름과 움직임 속에 더 풍부하고 새롭게 변이 할 수 있는 보다 충만된 '기관없는 신체'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처음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 이후 착상한 이 조직이 세포분열을 통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나아가는,
그 '알(卵)'로 '기관없는 신체'를 상상해 보자.
그 세포 조직이 어떻게 변화 발전해 나갈지, 무엇이 될지,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 총체로 과연 어떠한 완성체가 만들어질 것인지.
내(我)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我)들.
물론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그 대부분은 그냥 흔적도 없이 시들어 버리고 사라져 버리겠지만,
드물게 외부의 '지독한 자극'에 의해 '강렬도=0'이었던 포텐셜이 폭발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아니 쟤가 저랬어?'
2.
1509년 이탈리아의 한 대성당 근처 포도밭에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조각상
두 마리의 거대한 바다뱀에 의해 당사자만이 아니라 두 아들까지 신의 저주로 죽어가야 하는 비극적 내용.
그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신에 의해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나?
10여 년에 걸친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낸 트로이인들의 위업은 분명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무방할 게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군들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거대한 목마 하나.
모두가 '이제는 마침내 전쟁은 끝났구나!!'라며 환호하며 그 목마를 성내로 옮기려 하자,
바로 그 목마에 창을 던져 '텅~'하고 울리는 소리로 저 안이 비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트로이의 안전을 위해서는 당장 목마를 불에 태워야 한다고 주장한 '라오콘'.
누군가는 아폴론에 의해 또는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바다뱀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듯한 그에 대한 트로이인들의 짜증과 어리석음의 형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그 목마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가 또 있었구나.
프리아모스 왕의 딸인 카산드라.
하지만 그녀도 결국 아가멤논에게 포로로 끌려가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구나.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무기 없는 예언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였으며,
아이작 도이처는 트로츠키 3부작의 제목을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의 예언자' '추방된 예언자'라 각각 지었나 보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갔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의 운명과 새삼 맞아떨어지는 듯도 하니 말이다.
3.
최근 한 영화가 '천만 시대'라는 잊힌 듯한 단어를 다시 불러왔다.
1979년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12.12 쿠데타를 다룬 '서울의 봄'이다.
최근에는 이어서 1980년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야후(Yahoo) 같은 저들과 함께 2024년 4월의 봄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번 조국 혁신당이 봄날 푸른 광주의 하늘을 상징색으로 하는 것은 보며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1960년 4월의 함성,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5월 광주의 비극
참으로 비극적으로 갈가리 찢겨기고 짓이겨진 이 땅의 봄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가슴을 총칼로 찢어 놓은 것도 분에 차지 않아
권력과 언론과 사법의 힘으로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쓰레기 더미 속에 처박아 놓더니,
아직도 그 피냄새가 그리워, 힘겹게 살아남은 자들의 뭉개진 가슴팍에 더러운 아가리를 벌리고
더러운 침과 썩은 이빨로 킁킁거리며 주위를 배회하는 조중동과 국민의 힘을 비롯한 개쓰레기들의 미친 춤사위 속에,
우리는 오늘도 다시금 '찬란한 4월의 봄'을 맞이하길 바라고 있다.
'이번은 다르겠지...'라는 또 한 번의 헛된 망상이 될지도 모를 꿈을 꾸면서 말이다.
지난 시절 어두운 구석방에서 몰래 몰래 손으로 복사되고 인쇄되어 떠돌던 유인물들.
5.16에 이어 다시금 이 땅을 탱크와 군홧발로 짓밟은 그들의 만행,
순수한 민주주의의 열망을 무자비한 총칼로 짓밟은 5월의 핏자국이 채 지워지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때의 비극과 그 잔혹함이 잊히거나 묻힐까 두려워 그 많은 기억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모으려고 하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그 일들이 그 시대에는 너무도 위험한,
'고문 감옥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쳐야만 하는 가혹한 시련이었으니...
그 시절 12.12에 저항하고 그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그 잔인한 5월 광주 학살에 관련된 사진과 낡은 영상물로 진실을 알리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웠던 그들에게 조중동등의 개쓰레기 들은 무엇이라 하였든가?
그리고 2024년 오늘날 국민의 힘을 비롯한 그 쓰레기들의 잔재들은 또 뭐라 떠들고 있는가?
4.
'예언자' 또는 '선지자'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사전적으로는 단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신탁을 받는 사제의 의미로 한정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역사나 신화에서 언급되는 이들은 보편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눈을 가리는 장막을 거두고 '저 너머'의 진실을 제대로 보는 사람,
과거에 젖은 채 오늘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가로질러 내일로 달려간 사람들을 일컫는 게 더 어울리지 싶다.
하지만 그렇게 시대를 앞서간 그들 대부분은 외로이 차디찬 비바람에 찢기고 부서져 가아만 하였으니.
트로이의 안전을 위해 목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두 아들과 함께 죽어가야만 했던 라오콘
그리고 목마를 성내로 들이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나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카산드라.
권력과 언론 및 사법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졌던 수많은 고문치사 사건들의 진실,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그리도 치열하게 싸우며 죽어갔던 수많은 젊은 영혼들.
그리고 오늘날 썩어 버린 사법 및 언론 제도의 근본적 구조적 개혁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많은 이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가 있다.
세상을 위해 예언의 지혜와 용기를 가졌으나,
다른 이도 아니고 바로 그 예언이 가장 필요한 이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기고 부서져야만 하는 운명.
5.
언뜻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역사에서 예언자가 실질적인 힘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무장을 한 예언자는 결코 그렇게 허망하지 만은 않았었다.
그들은 치열한 현장에서 '전사(warrior)'로서 최전선에서 싸울 때 가장 아름답고 빛이 나지 않았나 싶다.
비록 1973년 9월 대통령궁에서 폭격에 맞서 장렬하게 쓰러져간 아옌데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기는 하지만,
때로는 위대한 승리자로서 때로는 비극적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사라져 가곤 하였었다.
소위 허울뿐인 '해방 80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친일 매판 세력이 강고한 'Big Brother'를 이루고 있고
그토록 많은 이들이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어간 피 맺힌 이 땅 한반도에서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자신을 던져 싸우는 이들에게 경이로움이 느껴질 때가 많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충분히 안위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서 말이다.
너무도 세속에 물든 나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2024년 4월의 봄을 앞두고 그들은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다.
이제는 나약해 보이는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적의 심장을 물어뜯을 '전사(warrior)'로서 말이다.
비록 바다뱀에 의해 자신과 가족들이 죽음의 나락 직전까지 끌려갔지만,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결코 꺾일 수 없는 의지로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부여잡고
그 뱀의 대가리를 댕강 자르고 조여들었던 몸통들을 뜯어 발겨버리려 한다.
그리고 어느덧 그 가능성이 조금씩 현실화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6.
간혹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게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이다.
지금은 서로 대화를 통해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하면서 합리적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시대이다.'
나는 한마디만 하고 싶다,
'그런 개소리는 당장 집어치워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미 '염려'는 지나갔다, 냉혹한 현실이 되어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다.
그리고 이 광란이 어디로 까지 미쳐 날뛰며 진행될지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예측들은 난무하지만, 가장 나쁜 극단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코 단 하나라도 잃거나 나누어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 부모를 죽인 자는 용서할 수도 있으나, 내 재산을 해코지 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 '그들의 썩어 바스러져 가는 그들만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짓도 감행할 의지가 있다.
더구나 사람은 마지막 벼랑 끝에 선 순간에도 언제 끝이 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비록 지금이 힘들지라도 이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몰락은 단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권력에 모든 것을 걸고 충성을 맹세하고 헌신을 각오한다.
7.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용서, 이해, 관용... 그러한 것들은 그들에게는 '진주'일 뿐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지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똥통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지내야 한다.
배워야 한다. 좀 더 철저히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온갖 썩어빠진 올가미로라도 어찌해 보려는 그들의 가련한 몸부림에서도 배워야 한다.
더 넓은 대지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던 인디언들은 나름 유럽인의 침략에 저항해 열심히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인디언들은 결코 순진하기만 한 평화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 정복자들이 유럽에서 쌓은 '진정한 야만'을 배웠어야만 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인디언들의 유약한 자세'가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비웃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대의 고통을 같이 하고 '저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이야기하는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가려는, 낡은 사법 언론 권력의 'Big Brother'에게 벼른 칼날을 휘두르는 '전사'로서 나아가려는 오늘날.
마지막 하나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라, 과감하라, 그리고 더욱더 과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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