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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좀 진지하게 생각한 이야기

늙은 개는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1.
김해 엄마한테 갔다가 포항을 들러 친구들을 만났다.
'화양연화'라는 중식당에 예약을 했다고 하여 들어가 보니 제법 깨끗한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자연스레 첫 대화 주제는 영화 '화양연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그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관계의 비뚤어짐은 대부분 잘못된 상상력에서 기인하게 된다.
즉, 바람을 피우지 않은 마누라와 남편들에 대한 오해로부터 그들의 애매한 관계는 시작하게 되니 말이다.
둘째는 사람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어찌 보면 마누라와 남편의 외도라는 의심은 그들의 불륜(?)을 합리화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핑계는 아니었을까?
뭐 대충 읽어보다 별 쓸데없는 소리(논리)라고 평한다면 그것에 동의한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깐.
 
그러면서 한 명이 언급한다.
'화양연화( (花樣年華)'가 뜻이 멋있지 않아?
'뭔데?'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기 뭐 그런 뜻이라더라'
 
2. 
군대를 제대한 것이 2004년이니 정확히 20년 전이다.
처음으로 취직을 한 곳은 250 병상 규모의  경기도의 신축 개원 병원이었다.
대부분이 나처럼 막 군대를 제대한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었기에 나름 잘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었다.
약 두 달이 지나고 새로이 소아과 과장님이 오셨는데, 그때 그분의 나이가 49이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약 1년을 그 병원에서 지내면서 유독 나를 챙겨준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뭐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내었다.
 
57의 나이에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을 하였다.
처음부터 근무 날짜 조정으로 센터장과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제까지 적응에 곤란을 겪은 적은  없었기에 한 달 정도만 지내면 되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이제 5개월이 지나가는 이 시간에 크게 문제 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어색하고 이상하고 불편하다. 확실히 이전 직장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문득 20년 전의 그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처음 오시고 며칠이 지난날 무심히 내가 물어봤다.
'오늘 저녁에 별일 없으시면 퇴근하고 홍어에 막걸리나 한잔 할까요?'
아마 비가 왔었던 것 같다. 그러니 삼합이 생각났었겠지...
퇴근 30분 전에 벌써 그 선생님은 내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 선생님의 기분이 최근의 나와 비슷한 것이었을까?
스스로는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라 여겼지만, 상대적으로 차이가 나면서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
'조금만 더 지나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일상에서 매번 부딪히는 그 어색함과 불편함.
아마, 그때 먼저 다가와 막걸리 한잔 하자고 한 것이 그분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일까?
그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역시 세월이 지나 내가 그 나이가 되니 그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도 하다.
물론 다른 이유였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연락도 끊긴 상황에서 확인할 길도 없으니 그냥 그럴 게다 여기고 넘어간다.
 
3. 
불과 1년 6개월전 이런저런 이유(핑계)로 공주를 떠나 경주로 직장을 옮기던 날이 떠오른다.
병원 2층의 진료실에 간단히 짐을 풀고 다음날 업무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모든 게 어설프고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니 또 어느듯 몇 달은 지냈던 곳처럼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역시 내가 어디가도 적응은 잘해'라고 착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새로운 이 곳에서의 생활도 그러하겠지라고 약간은 쉽게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경주와 이곳 문경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는 업무의 강도나 중증도의 차이가 저명하다.
노인병원에서 그리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게 상대적으로 느긋하니 아무래도 나 스스로도 여유를 가지고 적응할 수 있었을게다. 
하지만 이 곳은 응급센터이다 보니 정신적 업무적으로 여유가 없고 긴박감이 더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 경주에서는 내가 어린 나이였고, 다른 분들은 70, 80, 90대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분들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하지만 여기 문경에서는 내가 제일 연장자인 셈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였던가?
그래 뒤집어 놓고 생각을 한번 해본다.
나이 든 내가 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반대로 그들에게 나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일까?
나이가 드니 새로운 분위기나 시스템 등에 적응하는 것도 역시 느릴 수밖에 없으니 답답한 면이 있을 테고,
일을 하는 방식에서도 처음 손을 맞추는 것에도 젊은 사람보다 어색함이 더 있을 테고...
뭐를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불편함이 더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4. 
MLB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톰 글래빈이  자신에게 커터(Cut fastball)을 가르쳐 준 릭 피터슨 코치에게 한 감사의 인사말,
'당신이 늙은 개에게 새로운 제주를 가르쳐 주었다.'는 표현이 문득 생각난다.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은 항상 생각보다 조금 더 잔인한 법이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기 전에, 일단 그 누구도 결코 늙은 개를 반기지 않는다.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예전 남을 비방할 때 많이 썼던 표현 중의 하나가,
'늙어 가지고...' 
늙어서도 사람들이 대우를 해주는 경우는 대부분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을 때이다.
즉, 늙은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과 돈을 좋아하고 우대해 주는 것일 뿐이다.

혹시 지식이 많은 것도 대우를 받을 조건이 되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게다.
늙어서 지식이 많다고 떠들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은 망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짧고 정확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연스레 말은 늘어지고 사용하는 단어는 구태의연 하거나 고루해지고...
그냥 입을 닫고 있는게 제일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혼돈하는 순간, 그 결말은 초라함 밖에 남지 않을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름 처신을 잘~하는 경우에 그 무리 속에 남겨두며 적당히 챙겨주는 것이 최선의 예우가 이닌가 싶기도 하다.
 
5.
어제저녁에 접한 가게명(名)과 그 의미가 유독 머릿속에 남는 이유.
그것은 바로 내가 처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반증의 의미로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게다.
'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기
이런 시절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언제였지?
 
20살에 그나마 유일한 재능으로 여겨졌던 미술대학에 연거푸 낙방하고,
결국 생활을 위해 복지 시설에 의존하며 엽서 그림이나 그리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던 그 시절.
군대에 들어가서는 4년이나 복무하면서도 지도력 부족등을 이유로 일병에서 하사관은 제쳐두고 병장으로도 진급하지 못한 채 퇴역해야만 했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20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소설 '지리산'으로 유명한 작가 이태의 다른 소설집에서 기억나는 내용이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국군에게 학살당하여 어린 동생과 함께 입산(入山)하여,
2년 남짓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보급 투쟁을 나갔다가 쫓기어 죽어가야 했던 어린 소녀.
작가가 마지막에 남긴 문장이 10년이 지났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녀에게 얼마 되지도 않은 10대는 오직 추위와 굶주림으로만 기억될 것이다.'
 
6.
그러기에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어 보인다.
'화양연화'란 것이 꼭 과거를 회고하는 의미로만 한정되어 생각해야 할 것은 결코 아닐 게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으로
지금부터라도 준비하고 만들어가기에 결코 늦지만은 않은, 미래의 시간이나 시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쓸데없는 환상이나 썩은 '희망'을 품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런데 영화나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화양연화'는 대부분 사랑-그것도 주로 불륜-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니,
어느덧 그런 매체들의 사조에 찌든 우리들로서는
'아니 언젠가는 새로운 나의 이상형이...?'라는 뻔한 쓸데없는 망상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게다.
하기는 나이 50이 넘어서 뜨거운 사랑이라면 '불륜' 밖에 더 있겠냐만은...
그래도 이제는 그런 약간은 유치하고 낯 뜨거운 망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는 않았을까?
 
작년 처음으로 혼자서 2주간의 알프스 종주를 마치고 느낀 감회 중의 하나가
40 이후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한 결정 중에서 최고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인생 전체에서는?
뭐라 한 가지로 콕 집어 단정할 수는 없을 게다,
특히 갈수록 '결정 장애'가 심각해지는 오늘에는 더욱더, 내일은 더욱 더 그러할 게고.
더구나 어찌 될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직도 제법 남은 시간이 있으니 더욱더 그러하다.
 
7.
50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사람들과 만나서 많이 언급되는 내용 중의 하나가
'이제부터는 잘 늙어갈 준비를 해야겠다.'
지당한 말이다.
'잘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TV나 유튜브 등에서 간혹 접하는
탑골 공원을 배회하거나 가스통을 굴리며 도로를 장악한 태극기 라이방 부대를 보면 너무나 절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실천'이다.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실천적'이다.'-'포이에바흐에 관한 테제' 중에서-
물론 이런 어려운 표현은 내가 만든 것은 아니다.
20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의 주장인데,
개인적 이해 수준의 한계로 가슴에 팍팍 꽂히지 지는 않지만 때때로 되새겨지는 내용으로
이 글을 쓰면서도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기에 일부를 옮겨봤다.
 
툭하면 마누라나 자식을 구타하면서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라고 되뇐다고 하여
그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감동할 이는 없을게다.
역시 술만 마시면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떠들면서도 뻔한 추태나 재현한다면
누가 그와 함께 '늙어 감'을 공유하고 또 다른 화양연화를 꿈꾸려 하겠는가? 
 
8.
개인적으로 늙어감에 대하여 처음으로 조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계기는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냥 고전이나 한 권 읽어 보려는 의도로 얇은 책이라 골랐는데,
그 내용의 무게가 나를 한동안 그리로 몰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부적 내용은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노년이라는 또 다른 삶이란 것이 젊어서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새로운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삶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이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와 노년층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이제는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를 뛰어넘어 '국가 소멸'이라는 단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언급되는 이 땅에서
어쩌면 '노년의 삶'에 대한 고민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첨예하고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한 주제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경제적 문제를 중심으로만 언급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왈가불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결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신체적 능력, 사회적 지위, 인문학적 깊이, 다양하게 삶을 즐기는 노하우등등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여행을 떠난다, 사회 활동에 참여한다 등등.
 
9.
하지만 그 어떤 상상을 펼치고 실천적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여도,
늙어감이 결코 유쾌한 과정은 아닐 것이다. 
그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어떤 다른 잡다한 것들로 가리고 숨기고 싶지는 않다
물론 늙어감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리 자랑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결코 나서서 늙은 개를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내 가족 이외에는 기껏해야 측은지심으로 그렇고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그나마 다행히 아니겠는가.
 
'... 지나간 것은 지나 간대로 어떤 의미가 있죠...'
그래 내가 살아온 길이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이리저리 찢기고 부서지면서 초라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 사이사이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름의 너무도 소중한 '의미'를 가진 것들이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그 '의미'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그렇다. 비록 이미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상상하며 꿈을 꾸고는 한다.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제는 '가장'이라는 단어는 빼야할 지라도,
내 인생에 있어 아름다운 가치있는 의미있는 또 한번의 '화양연화( (花樣年華)'
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