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는 역시 한니발의 침략에 의한 2차 포에니 전쟁일 게다.
근 16년 동안 로마 전역이 철저하게 유린당한 그때의 그 치욕과 고통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찌 보면 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제된 느낌이 없지도 않다.
하지만 어떻게 점령한 도시 전체를 불사르고 모든 주민을 학살하거나 이주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그 땅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까지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마치 그 땅을 지도에서 지우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고 싶은 의도였을 게다.
이후 세월이 흘러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항구 도시로서 카르타고는 다시 건설되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바로 로마에 의해서 말이다.
이후 반달 왕국 시절에는 로마보다 더욱 번성하는 영광의 시기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스스로 독립하여 선조의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로마를 침략한 역사는 없다.
-사실 '선조의 복수를 위한 전쟁'이란 말 자체가 완전 개소리이다. 그런 전쟁은 절대 없다.
인간은 그렇게까지 '선조'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냥 핑계일 뿐이다. -
물론 다른 여러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그때의 그 패배가 너무 뼈저렸었나?라고 상상해 본다.
2.
넷플릭스에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6편짜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해상과 공중의 전투 장면, 폭격당한 도시, 비참한 유대인, 독일과 일본인들의 모습 등등을
그 시대의 필름을 그대로 살려서 너무도 생생하게 편집하였다는 것이다.
간혹 주요 전투들이었지만 미처 필름에 담지 못하여 다루어지지 못한 부분들도 있어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어찌 보면 가장 그 시절의 실제 모습에 근접한 다큐이기에 나름 관심 있게 보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서 이어져 오는 자연스러운 의문 하나.
왜 독일은 1차 대전 이후에는 진정한 사죄의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가 다시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며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에야 뼈저린 사죄를 하였고,
그에 반해 왜 일본은 여전히 일장기보다 욱일기를 앞세우는가?
민족적 인종적 차이라기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독일이 다르지는 않다.
더구나 그런 유치한 이유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전쟁 이후 수립된 일본과 독일(1차 대전, 2차 대전 각각의)의 정치권력의 성격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결과를 만든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는 않을까?
3.
1945년 4월 소련 주코프가 이끄는 탱크 부대가 본토로 들어서는 순간 독일인들은 얼마나 놀랬을까?
다름 아니라 바로 며칠 전 국민 돌격대의 최고 총사령관이자 제3제국의 수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라디오 연설에서
'독일은 독일로 남는다'며 독일의 안전과 승리를 그렇게 약속하였으니 말이다.
루스벨트는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예상되는 베를린 침공을 소련에 떠맡겼는데,
이것은 독일에게는 엄청난 악몽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근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무자비하게 자행된 독일의 침공에 의해 부모 형제를 잃은 소련군들에게는
드디어 마침내 그 원수를 갚을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으며,
더구나 독일군에 사로잡힌 영국군과 미군의 포로 사망률이 3.5~5.1% 였던 것에 비해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은 자그마치 57%에 달하였다고 하니,
한마디로 악에 바친 소련군의 베를린 침공 전에서의 전투력과 각오 결의는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말 그대로 그들이 지나가는 도시는 완전한 초토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동부전선으로 무섭게 밀려오는 소련군만이 아니었다.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폭격'은 당시 최대 폭격으로서 독일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케 한 결정타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어지는 서부전선에서의 영국과 미국등의 연합군의 파상 공세는 결코 소련에 뒤지지 않는 초토화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독일 전역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4.
그러면 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 공방전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없었다.
너무도 현명하게(?)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공격해 오기 전에 재빨리 '휴전 협정(항복)'을 맺었다.
그러기에 어찌 보면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은 실질적인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를 모른 채 그냥 지나간 셈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침저녁을 먹으며 라디오나, 커피숍에서 신문이나 소문등을 통해서나 접할 뿐이었다.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나는 시기 까지도 비록 약간의 질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베를린을 비롯한 도시 지역에의 커피나 빵 우유 고기등의 식료품 공급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하니,
그들이 '참호전'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인 제 1차 세계대전을 어찌 체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아니 매일 이기고 있다는 전쟁이 왜 갑자기 패전으로 끝나버린 거지?, 위대한 독일이 그럴 리가 없어!'
결국 그들은 그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동포의 등에 칼을 꽂은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의 배신이었다.
독일이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환상 속에 진흙 구덩이에서 뒹굴기만 했던 병사와 하사관들
겨우 살아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풍비박산이 나 있고, 당장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깨지고 찢어지고 부서진 몸뚱이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한 분노는 출구를 찾게되고 자연스레 또 다른 약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합리적인 사고? 논리? 이성? 그런 거는 개에게나 줘버려야 할 게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분노, 반전(反戰)을 외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레 나치즘을 만나 활활 타오르게 된다.
5.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독일의 패망이 확정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2600년 이상을 이어온 '천황'을 모시고 '1억 옥쇄( 一億玉砕 )'를 다짐하며 본토결전을 떠들 정도였다.
하지만 6월 가미카제 특공대까지 동원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더욱 급속히 전세는 기울게 되고
8월 마지막 결정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두발의 원자폭탄은 전쟁에 실질적인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러나 비록 1945년 3월을 시작으로 대량의 소이탄등을 이용한 수차례의 도쿄 대공습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전은 '오키나와 전투'가 마지막으로 기록된다.
이것이 일본에게 다행인지 여부는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의 극렬한 저항은 미군의 대량 인명 손실로 이어졌으며,
이는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원자 폭탄을 사용하게 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즉, 일본 본토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비록 어느 정도의 생활고는 겪었을지 모르지만,
직접적 폭격을 당하지 않은 지역의 주민들에게 있어
전쟁에 대한 모든 소식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신문이나 라디오 또는 소문으로만 접할 뿐이었다.
마치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말이다.
더구나 위대한 천황의 군대는 중국, 필리핀, 버마등의 동남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더욱 나아가 이제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도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 하니,
지금 이 정도의 고통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은 직접적인 전쟁의 참상, 특히 잔인한 현대전의 비극적 현장을 직접 겪어보지, 당해보지 않은 것이다.
6.
결국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하는 그날
그 수많은 남녀노소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그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후회하는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전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이었을까?
비록 그들이 도쿄 대공습이나 두 차례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그 정도로 그들의 의지나 사기가 꺾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직접 닥친 문제가 아니라면 결코 그렇게 깊이 공감하지 못한다.
더구나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위대한 황군(皇軍)의 승리의 찬가만 들려온다.
그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게다. 동시에 너무도 억울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이제 마지막 승리가 바로 눈앞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항복을 하다니,
'우리는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단지 원자 폭탄에 졌을 뿐이다.
그것만 아니였다면 위대한 천황을 모시고 '1억 총옥쇄'의 각오로 싸워 이길 수 있었는데...'
7.
어떤 결과에 대해서 한 두 가지의 요인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에서 전개된 과거사에 대한 극단적 입장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의 독일 정치 세력들의 흐름의 차이에 대해서도,
어느 것 하나로 규정하여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요소들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이든, 때로는 부차적인 것이든 사전의 예단 없이 말이다.
당연히 보다 많은 복합적 요인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이 노정(露呈)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가장 유치하고 비열한 민족적 인종적 차이를 운운하는 어리석음은 때로는 분노와 짜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직접적인 전쟁의 참상, 거주하는 도시의 초토화 및 살육전을 겪지 않은 1차 대전의 독일과 태평양 전쟁의 일본
그 잔혹한 참상을 나름 고스란히 겪으면서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져야 했던 2차 대전 이후의 독일.
역시 다큐멘터리나 르포 문학의 최대 장점은 '날 것 그대로'가 아닌가 여겨진다.
문학이나 영화등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상상 속에서 짜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욱 가슴 깊이 새겨지게 하는 '날 것의 미학'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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