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의 어느 날, 기상 이변으로 인한 폭풍우를 뚫고 비행기 한 대가 무사히 착륙을 한다.
그런데, 그 해 6월에 같은 기장 같은 승객을 태운 같은 비행기가 다시 같은 상공에 나타나고 착륙을 한다.
그리고 기장과 승객들은 그날을 3월의 그날로 인식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당연히 SF 소설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으나, 2020년 콩쿠르상 수상작이라니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게 유명한 문학상의 힘이고, 우리는 대충 굴복하며 지내지 않는가...
즉 같은 비행기가 같은 기장 및 승객들을 태우고 두 번 착륙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4개월 후 같은 비행기가 다시 상공에 출현하고 정부는 그 비행기를 격추해 버린다.
무한히 동일한 것들이 반복되는 상황과 그로 인한 무한한 혼란을 용납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객지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더구나 별다른 일이 없는 무료할 수 있는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1년이 될 지, 2-3년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제일 쉽고 익숙하고 만만한 길을 다시 찾는다.
이런저런 책들을 구입하여 읽는 와중에 하필 그때 '니체의 삶'이라는 책이 잡혔다.
평전이나 해설서 등을 먼저 읽게 되면, 부족한 나의 지적 한계성으로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원전이 읽히기에
이제까지 제대로 된 니체의 평전이나 해설서를 읽지 않았었는데,
어느 정도 그에 대한 관심이 포기(?)된 싯점에서 괜찮아 보이는 책이 있어 구입을 하였었다.
이전에는 약간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몇몇은 내가 잘못 알고 있기도 하였던 그의 삶의 궤적들은
'새롭게 그의 서적을 뒤져볼까?'라는 욕구까지 낳았으니, 책 값은 제대로 한 셈이라 할 수 있을게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혹시 그 'Anomaly'의 작가는 바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었던 아닐까?
동시에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 하나 - 보통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기 마련인데...- ,
만약 이에 대해 뭔가를 긁적인다면, 엄청 초라하거나 황당한 글이 될 텐데
아니 제대로 끝을 낼 수는 있을까?
ㅎㅎㅎ,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혼자서 골방에 갇혀 춤을 추는 심정으로 한번 해보고자 한다.
2.
'산을 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생각하지 말고 그저 위를 향해 오르라.'
'왜 저 높은 곳으로 힘겹게 올라가지?
가볍게 날아가면 될 텐데'
첫 인용문은 '즐거운 학문'에서 확인했지만, 두 번째 인용문은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확실하다(그럴 게다, 그럴걸... 내 머리의 한계이다.)
니체의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아포리즘적 형태를 띠게 되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글을 읽는 사람에 따라 보다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될 소지가 열려있는 것이다.
위의 두 문구도 그러하다.
도대체 어떻게 오르란 말인가?
묵묵히 걸어서 올라가란 말인가? 아니면 날아 올라가란 말인가?
전자는 천민의식이라 욕들을 것 같으며 니체적이라 하기는 좀 거시기해 보이는데...
유고(遺稿)를 포함하여 21권의 전집에서 찾아보면 무슨 글이나 어떤 표현이 없겠는가?
어차피 그 많은 양을 다 읽을 수 없고, 읽어도 기억하기 불가능이니,
읽는 자에게 의미 있는 새겨지는 내용만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게다.
학생 시절부터 '족보-야마(YAMA:You Are My Assistant. - 참, 이름도 잘 갖다 붙인다.)'에 의존하던 습성이 아직도 버려지지 않아서인지
흔히 새롭게 중요한 뭔가를 접하면 '그래서 요점 핵심이 뭔데?'
니체를 이해하는 것도 여기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들이 몇 가지 핵심을 언급하곤 하였다.
초인(위버멘쉬), 디오니소스, 힘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 영원회귀 등등
대부분 다른 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단어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하지만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동양인들에게는 얼핏 듣기는 '윤회 사상?'이라는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갑자기 국수주의적(?) 친근감이 몰려올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니체 스스로가 여러 번 언급은 하였지만,
명확하게 정리를 해 놓지는 않았기에 다양하게 해석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설명에 나름 유용하지 않겠는가?
나도 이해하기 힘든데, 무슨 말인지 알고 어설프게 인용을 한단 말인가?
얄팍한 내 수준에 맞춰, 내가 이해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그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글을 이어가 보려 한다.
3.
'이끼'라는 영화에서 생각나는 대사 하나가 있다.
'니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영화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그 대사는 한참을 머릿속에 입가에 맴돌다시피 하였었다.
그리고 갑자기 '영원회귀'를 논하려는 순간 문득 그 대사가 불현듯 떠오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들, 이것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들을 사막을 지나가는 낙타처럼 묵묵히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순간을 '정오의 시간'으로 받아들여 긍정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사랑이니 긍정이니를 떠나서 영원히 반복되는 삶 자체를 '니(는)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순간들이라,
하늘이 한 번 더 기회를 줬다고? 아니, 한 번 더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판도라의 상자에서 미처 꺼내지 못하고 마지막 남아 있었던 'Elpis'
그 'Elpis'를 긍정의 메시지로 위안을 삼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왜 제우스가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냈겠는가? 상자까지 쥐어 주면서 말이다.
모든 것이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에서 오직 하나 'Elpis'만은 긍적일 것이라 기대하는 그 어리석음.
왜? 미처 상자에서 나오지 않아 그 공포를 직접 겪어 보지 못했기에?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무한한 기대와 가치를 부여하는 습성이 있어서 인가?
Elpis 그것은 나쁜 것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일 게다.
인간의 행동을 가로막고 인간의 불행을 오래오래 끌게 되니 말이다.
'다 잘될 거야'라는 헛되고 헛된 '희망'속에서 말이다.
어쩌면 니체가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인(위버멘쉬)'이 되고 싶다고?
그전에 무수하게 반복하며 굴러가는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를 제대로 바라보기나 하겠는가?
'네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4.
아무리 철학적인 주제라 하더라도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약간 애매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다.
종교학, 고전 문학, 음악, 언어등에서 독일 연방에서 가장 전통이 깊은 학교인 슐 포르타에 14살의 나이에 입학하여,
역대 가장 재능 있는 학생으로 인정받았던 니체.
그런 니체가 이상하게도 수학에서는 완전히 낙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거의 억지로 졸업을 한 셈이니...-
만약 과학에는 완전 젬병이었던 인문학적 천재 중의 천재가 자연과학을 잘못 이해하면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다면,
니체가 '에너지 보존 법칙'을 이해하는 것-특히 철학적으로-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 중의 하나 일 지 모른다.
이 자연법칙에서 '영원회귀'의 기본적인 원리를 깨우쳤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게다.
5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이제 같이 지내는 가족이라고는
목사의 부인이었고 목사의 어머니였던 지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할머니,
허약한 체질에 다소 신경질적이고 정신병적 가족력을 지닌 배다른 고모 두 명,
18살에 시집와서 23살이 된 5년 만에 아들 둘과 딸 하나만 남겨진 채 과부가 된,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1년 후 막내는 죽고, 착하게 오빠를 따르는 듯하였으나 결국에는 괴물(or 마녀)이 되어버린 여동생.
이런 환경에서 이런 여성들의 애지중지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작고 연악한 남자애를 상상해 보자.
그리 긍정적이거나 유쾌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게다.
특히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그의 건강이었다.
11~12살 때부터 구토와 극심한 두통, 빛에 예민한 눈의 통증등으로 일주일씩 어두운 방에서 지내야 하는,
그리고 이 증세가 일회성이나 어느 일정 정도의 성장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89년 44의 나이가 넘어 채찍질당하는 말의 목덜미를 붙잡고 울부짖으며 쓰러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호전되었다가 악화되었다가를 반복하는 그 고통의 시간들.
1년에 보통은 120일가량의 시간을, 심할 때는 200일이 넘는 시간을
빛이 제한된 어두운 공간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다량의 수면제와 아편등에 의존하며 지내야 했던 니체.
생각만 해도 그의 끔찍했던, 질병과의 평생의 전쟁에 대하여 안타까움이 배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증세가 악화되었다가 다시 호전되는 그 시기는 하나의 삶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즉 새로운 통증이 시작되면 저 깊은 하데스의 세계로 떨어지는 죽음을 의미하고
다시 증세가 호전되면 새로이 탄생하는 부활의 환희의 순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죽음과 탄생은 1~2년에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수 십 년 간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도저히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영원히 반복되는, 영원히 반복하여 마주해야 만 하는 그 '순간'인 것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는 '긍정-부활과 환희-'의 힘(의지)을 결코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끈을 놓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회귀할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회귀하여야 만 한다.'
그가 펼쳐야 하는 알려야 하는, 그 만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그 고귀한 가치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말이다.
독수리에게 간(肝)을 뜯기 우면서도 매일 부활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이 떠오르지만,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초인의 삶, 타인에 의해서 해방되는 초인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구나.
5.
죽기 직전 감옥에서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졌다'는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천민이며 못생겼다고, 염세주의자이며 평생 병들어 살았다고 몰매를 맞은 불쌍한 소크라테스.
니체는 왜 그를 그리도 미워하였단 말인가?
단지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위인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데, 소크라테스는 결혼을 하였기에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설 수 없다?
무슨 개소리인지? ㅎㅎㅎ
루 살로메에게 두 번이나 청혼을 하였다가 거절당하면서 '성스럽지 못한 삼위일체'라는 희한한 연애 행각을 벌였던 그가,
돈 많은 상속녀를 찾아서 그리도 헤매었던 그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아마 결혼 문제는 그의 유머일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자.
어쩌면 그가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가지는 불만은 '국가'에 대하여 관점의 차이에서 살펴볼 만하다.
'크리톤'에서 보이듯이 소크라테스에게 국가란,
감옥과 사형의 위협을 무릅쓰고 라도 국가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니체에게 국가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이들이 고안한 것으로 모두가 독배를 먹고 죽어 나가는 곳일 뿐이다.
그에게는 국가가 무너지고 있는 저쪽에 무지개와 위버멘쉬에 이르는 다리가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 소크라테스는 운명에 굴복하는 병적인 상태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의 차이라 하여도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쏟아내는 비난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어쩌면 그가 그토록 경멸하였던 르상티망의 한 형태인 '시기심' 때문은 아닐까? 아니 무엇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 질투 시기심 등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조금 황당한 생각이 든다.
그는 많은 책을 내면서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리려 애쓰는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어나갈 훌륭한 제자를 원하였었다.
하지만 첫눈에 미쳐버린, 누구보다 뛰어났던 루 살로메는 연인으로서도 제자로서도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버리고,
그 밖의 인연은 제자라기보다는 추종자이거나 보조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자신의 철학을 물려받을 이가 없다고 생각한 그로서는 얼마나 소크라테스가 부러웠을까?
또 하나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과잉된 반응은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의 표현은 지금 다시 읽어도 그의 나약함이나 병든 정신을 느끼기보다는
억울할 수 있는 죽음을 앞둔 현자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물씬 풍길뿐이다.
하지만 니체가 편지에서 피로 토로하는 듯한
'내 인생 전체가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지. 내 주위는 온통 캄캄한 밤이야....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 같네.'
가볍게 닭 한 마리 빚졌다며 던지는 말과 위의 편지 글을 비교하면, 과연 누가 더 나약하고 병든 것처럼 보이는가?
지독한 고난 속에 매 순간 좌절해 버릴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래도 자신의 철학을 제대로 세우고자, 널리 알리고자 분투하는 그.
지독한 두통 메스꺼움 눈의 통증, 바그너의 배신(고자질?)과 죽음 그리고 코지마와의 단절,
루 살로메와 레와의 이별, 어머니와 동생과의 관계 악화
그 힘겨움 속에서도 책은 제대로 팔리지도 않고, 이제는 자금난 등으로 출판사도 꺼리는 지경에 이른 그의 현실.
이 순간에도 부활의 기운이 넘치는 시간에는 긍정의 힘을 짜내려 하는 그의 분투.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정신적 무장의 다른 표현
- 그것이 바로 '영원회귀'가 아닌가 싶다.
-- 그 외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비판하였던 변증법, Agon에 대한 바판, 데카당스 등에 대해서는
솔직히 내가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기에 그냥 넘어간다.--
6.
개인적으로 공자가 40에 불혹(不惑)을,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등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극복했다기보다는 그것을 이루려는 그의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미 그가 그것을 이루었다면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이룬 것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기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법이니 말이다.
니체가 자기 사상의 핵심 중의 하나로 이 '영원회귀'를 반복하여 언급하는 이유도,
그가 그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르기를 원하는 그의 간절한 욕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죽음과 부활의 순간순간'을 긍정의 힘으로 이겨 나가려는 그의 지난한 투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힘겨움만 더해져 갈 뿐이었으니...
혹시 그의 본심은, 그의 진정한 욕망은 이 '영원회귀'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진정으로 그렸던 그 위대한 '초인(위버멘쉬)'은 마주 대하여 극복하는 이가 아니지 않았을까?
진정 그가 꿈꾸었던 이는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지고 강을 넘어갔'던 그 크리스토퍼.
자신을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저 강 너머로 옮겨 줄 '초인(위버멘쉬)' 말이다.
물론 결국 그 강 건너는 지독하고 허황된 반유대주의자이며 나치 추종자였던 여동생이 있던 빌라 질버블리크의 어두운 2층이고,
시간이 지나서는 저 깊은 하데스의 어두운 세상이었지만...
7.
3개월 시간 차이로, 같은 비행기가 같은 기장과 승객등을 태우고 같은 상공에 두 번 나타난다?
그리고 4개월 후에 다시 같은 현상이.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이 난리는 3번째 출현 비행기를 미사일로 폭격하면서 소설은 끝나 버린다.
4번째 또 나타나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작가는 그에 대한 답을 줄 의무는 없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의 몫이다.
그러면 그 세 번째 비행기 폭격은 민간 학살이라 할 수 있나? 그것도 답을 줄 의무가 없을 게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그 또한 각 독자들의 나름의 몫이 될 테니...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보다 다양한 여러 가지 생각을 펼쳐나갈 모티프를 제공하였기에
너무도 만족스럽게 함께 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나름 좀 진지하게 생각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 원유 가격 (0) | 2023.02.02 |
---|---|
'귀족주의'를 꿈꾼다. (0) | 2022.12.27 |
너무 요원(遙遠)한 꿈이려나? (0) | 2022.12.19 |
'용서' - 개에게나 줘 버려라. (0) | 2022.12.03 |
50대에 읽는 책의 의미? (0) | 2022.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