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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좀 진지하게 생각한 이야기

'귀족주의'를 꿈꾼다.

1.

"뱀에 물려 죽은 용이 있었던가?

독을 다시 거두어들여라, 너 그것을 내게까지 나누어 줄 만큼 넉넉하지 못한 터에"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쉬다가 살모사에게 목덜미를 물린 자의 여유이다.

 

천민이나 거렁뱅이에 대해서 책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인간이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세상이 평등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도 하는데,

사람들은 비난을 하기 보다는 그 의도를 분석하고 해석을 하기에 힘겨워하는 그런 글이 있다.

스스로가 신(神)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였고 

말년 정신병원에 감금되기 직전에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린 자', '디오니소스'로 착각하기도 하였으니

이런 자를 온전히 제대로 이해 하기는 너무 어려울 게 뻔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난 오늘날,

살모사에게 목덜미를 물리고도 여유로웠던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에게 스스로를 투사하려고 그리 안간힘을 썼던 니체를 생각하면서 하나의 주제를 떠올린다. 

 

2. 

일리아드나 오뒷세이아등의 그리스 희극(비극)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 보다 더 오래된 신화나 서사시는 있을까?

신화가 있다는 것은 그 시대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즉 그리스 보다 더 오래된 문명사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신화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곧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마동석이 출연하며 극 중 역할을 맡았던 할리우드 영화 '이터널스(eternals)'에서의 길가메시.

BC 3000~3500년의 언어이니, 지금으로 부터 5000년 전의 언어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인 '수메르어'로 쓰인 신화라.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그 언어를 어떻게 읽고 번역할 수 있었단 말인가?

수 천년 간 사막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잊힌 문명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그 어려운 작업.

아니 도대체 위의 글(?, 그림이라 해야 하나?)을 어떻게 오늘날의 문자로 해석한단 말인가?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해 봐도 황당하고 존경스러운 따름이다.

어디에서 읽은 글에 의하면 이 문자 해독을 시도한 학자가 약 30년에 걸쳐 알파벳 6글자를 찾아냈었다고 한다.

- 물론 정확한 기억이라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느 정도 가속이 붙으면서 작업이 빨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원히 사라져 버릴 뻔하였던 인류의 역사가 새로이 밝혀지게 되고.

 

한때는 미국의 걸프전 원인이 바로 이 수메르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였다는 '설(說)'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근원인 성경의 신성(神性)이 무너질 위험에 처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소위 성경 내용의  대부분이 수메르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이유이다.

그래도 설마 그 때문에 전쟁을 하였겠는가, 나는 믿고 싶지 않다.-진심이다?- 

 

'제국주의'라는 것이 그 고통을 겪은 민족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로 남는다.

더욱이 그 상처를 오롯이 간직한 이 땅에 태어난 운명으로 그 trauma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적대감을 감추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이야기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욕을 들어 먹을 생각이겠지만,

제국주의 시절이라 한들 이러한 '문화사'에 남긴 거대한 업적을 애써 폄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다.

 

3.

이러한 시각에 대하여 가벼이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라고 이해될까 저어 되기도 한다.

수메르 문화에 대한 탐구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 제국주의'의 본질적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라며 무제한적 약탈과 수탈로 점철된 저급한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5000년 전의 언어문화와 역사를 논하는 자리도 결코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나는 약간의 억지를 덧붙여 '문화 귀족주의'라는 이름을 떠올려 본다

정치-경제-문화등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이나 개입 없이 그 본연의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특권 같은 '천민들의 꿈'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씹어 버리는 자세.

좀 더 차원이 다른 그리고 격이 다른 문화를 찾고 향유하려는 의식적 노력으로서 말이다.

 

더불어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술적 감각으로 마음껏 향유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나,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여 좌절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런 지향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가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나 술 취해 늘어놓는 듯한 넋두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좀 더 높게 만들어 나가는, 부분적이고 한계를 가지겠지만 가능한 이어가려는 그러한 노력들

이를 '귀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이를 지향해 나가는 삶을 그려본다.

 

4.

'귀족'이라는 개념을 떠 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royalist'이다.

한여름에 격식을 차린다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시종의 도움을 받으면서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는 듯한

영국이나 프랑스의 늙은 공작이나 백작들?, 조선의 늙은 선비들?

이미 몰락해 버린 낡은 왕조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복받치는 분노로 상소문이나 격문을 쓰는 그들?

 

그런 낡은 '왕당파'의 개념으로 21세기에 언급되는 '귀족주의'를 상상하지는 않을 게다.

눈앞에 보이는 이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거는 '천민자본주의'

오직 내 생각만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풀어나가는 유일한 진리라는 망령에 휩싸인 그런 '천민주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할 게다. 

경제 활동을 하더라도, 그 속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

'나'가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보다 공동체적 가치를 위하고 지키려는 노력

그냥 전체의 흐름에 스스로를 맡기는, 이웃들과 그냥 대충 흐드러져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그들과 '거리(distance)'를 두고 외로이 머물면서 스스로를 정리하고 단련시켜 나갈 수 있는,

때로는 그들과 '더불어(with)' 함께 큰 역사의 발걸음을 디딜 줄 아는 그런 존재

노동 자본 환경 역사 문화 스포츠등에 대해 그리 깊지는 않으나 얕은 지식만으로 희롱하며 거닐 수 있는 존재.

 

흔히 사람들은 '새 XX' '新 XX' 'New XX'라는 단어를 붙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마치 이 단어의 구태의연함에 스스로 뭔가 찔리는 듯한? 아니면 나름 그 단어에 역사성이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적어 놓으면 사람들은 찰떡 같이 이해할 것이다.

21세기에 구닥다리 낡은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앞에 글자 하나를 집어넣는다고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런 게 대부분 사이비 이거나 제대로 작동된 적도 없으니 말이다.

 

5. 

몇 년 전 초창기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야후'가 매각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약간 씁쓸하였었다.

아~ 세월 앞에는 영원한 장사가 없구나.

특히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는 인터넷 세상에서는 더욱더 말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오랜 시간 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다.

- 아니, 설마 그런 동화책이... 왜? - 

흔히 우리들에게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거인국등을 여행하는 동화로 기억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주 노골적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한 '정치 풍자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현실 정치를 풍자하였다는 이유로 금서로 묶기에는 약간 불편하였는데-이 땅에서라면?-,

4번째 여행에서 그가 도착한 땅은 이성적인 '휴이넘'과 원시 인간의 형태를 한 '야후'들이 사는 세계를 묘사하였다.

그 책이 출간된 1726년, 진화론을 인정하는 듯한, 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말(馬) 보다 열등한 존재로 설정한 것 등은

정치적 주제를 배제하고서도 당시 성직자들에게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충분한 식량이 있어도 '탐욕'으로 서로 많이 가지기 위하여 싸우는 그들

항상 몇몇이 무리 지어 다니며 시끄럽게 고함이나 질러대고 툭하면 치고받고 분란이나 일으키고

그들이 살아가는 숲 주위를 음식 찌꺼기와 오물들로 더럽히기만 하는 추악한 존재들.

간사하며 성품이 악하고 배반을 잘하면서 복수심도 강하며 건강하지만 겁이 많은 정신을 갖고 있는 야후들

이에 반해 반듯한 이성을 가지고 겸손하고 고귀한 가치를 존중하며 청결하게 살아가는 휴이넘들.

그들은 많은 논의를 거친 다음 안타깝지만 걸리버를 추방해야만 하였다.

'이성을 가진 야후'라는 전대미문의 위험 요소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기에 말이다. 

그리고 인간 세계로 돌아온 걸리버는 더 이상 인간(야후)과 교류하지 못하고, 말(馬)과 지내면서 끝난다.

 

6.

어떤 개념이 명확하지 않을 때에는 그 반대되는 개념이나 구체적 예시들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21세기에 '귀족주의'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18세기 앙시엥 레짐으로 대표되는 낡은 '왕당파'는 아니고, 더더욱 '야후'와는 격이 분명 다를 터이다.

그렇다고 '죽림 7현'이라 일컫어지는 부류와도 결이 다를 터이고,

18, 19세기에 출현한 소위 '법복귀족'이나 신흥 자본가 집단과도 결이 다르게 와닿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어야 하나? 진보적이어야 하나?

경제적으로 최소한 강남에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하고, 벤츠나 BMW 정도는 기본인가? 

일 년에 한두 번의 해외여행과 두세 번의 오페라 공연을 즐길 줄 알아야 하는가?

더불어 산다며 TV에 나오는 몇 군데에 정기 기부를 하는 정도의 여유가 수반되면 되겠지.

그래 최소한 한 달에 최소한 2~3권의 책 정도는 구매를 해야겠지,

물론 때로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같이 하는 감(感)도 중요하니 말이다.-전공 서적도 다 읽지는 않았으니...-

 

또 뭐가 더 필요하고 어떤 걸 더 충족시켜야 하나?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 '슈퍼맨 증후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이러한 구체적인 예시들이 어렴풋한 개념 정리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간혹 그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으니.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단련시키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편협한 뭔가에 얽매이지 아니하여야 할 게다. 단지 스스로 만족하고 즐길 뿐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도 하지 않는다. 삶에서 중요한 주제이기에. 단지 항상 '거리(distance)'를 두려 한다.

때로는 가슴으로 받아들여 같이 하기도 하지만, 가능한 한 발자국 비켜서서 살아가려 한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강남에 집이 있든 해남에 집이 있든, 벤츠를 타거나 소나타를 타거나

거기에 얽매이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마음 가는 데로' - 스스로 만든 넓은 선택의 범위 속에 가능한 자유롭게...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되, 쓰레기는 제대로 분류 처분하여 섞이지 않게.

그리고 결코 열심히 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여 아등바등거리지 않는다.

그건 천민들의 자세일 뿐이다.

가능한 느긋하게, 조금은 게으르게, 천천히...

 

7.

하지만 경계하여야 할 것들도 있을게다.

결코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물러 터진 것처럼 살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왜 그리도 단단한가! - 언젠가 숯이 다이아몬드에게 말했다 : 우리는 가까운 친척 사이가 아닌가?"

'... 가장 고결한 자만이 단단하다.... 단단해질지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던 것.

세상에 공짜는 없다. - 아니, '나에게만(?)'은 공짜가 없었다.

어떠한 대가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각오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공짜? 그건 너무 천민적 근성이 아닐까, 아까운데? 그것도 역시.

 

'귀족?' - 너무 무거운 삶이 아닐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으면서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이려나?

땅바닥에 눌어붙어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니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삶.

병들고 쇠약해진 몸으로 지치고 피폐해진 정신으로 어떻게 즐겁게 노닐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쉴 줄을 알아야 한다.

특히 잘 노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기예이다. 

너무 무겁거나 진중하여도 안되고, 너무 가볍고 자극적이기만 하여도 불편해진다.

잘 먹는 것도 역시 그러할 것이고, 잘 자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그저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현실 속에서.

어쩌면 나약한 이들은 그냥 대충 살련다며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저 높은 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북적거린다면, 그곳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8.

새로이 어떤 개념을 만들고 설명한다는 것이 참 힘들기는 하다.

더구나 사람들 마다 나름 머리를 스쳐가는 다양한 생각이나 영상 또는 이미지들이 있을게다.

이리저리 나열하다 보니 문득 드는 솔직한 느낌 하나.

'아~ 예전에 내가 술 (쳐) 먹고 한 짓만 빼면 되겠는데...' 

 

그래, 예전보다는 나아져야겠지. 이제 술도 거의 끊은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하여도,

강제된 운명을 수긍하고 새로이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삶의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5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삭풍이 불어 제치는 이 시점.

호르몬의 영향인지 세월에 지쳐 버린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닳아버린 것 인지.

이제는 맷집도 너무 형편없이 약해져 버린 오늘날.

이제라도 늙어감을 준비하며 보다 조심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그려본다.

 

잘 늙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