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크 헤다야트'라는 이란 작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낯선 작가이지만 '눈 먼 올빼미'라는 그의 작품은 이란에서는 80여 년간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
이란에서 금서라?
그러면 또 종교나 지도자를 모독하였나?라는 정치적 주제가 먼저 떠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비슷한 이유로, 즉 많은 젊은이들을 자살로 이끈다는 이유로 금서이다.
확~ 관심이 갈 것이다. 아니 무슨 내용이기에??
그래서 지금도 그 책은 금서이지만, 동시에 이란에서는 읽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금서'라는 이름이 책 판매에 혁혁한 기여를 하는 것은 이 땅이나 이란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한 사람은 사서 읽어면 좋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자살할까봐? 전혀 아니다. 한글판에서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기에, 두번째는 시도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었다.
미국에 사는 한 이란 출신의 작가는 아들이 그 책을 찾을 때 영어로 된 번역서를 주었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아들은 이란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지만,
아버지의 걱정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소중한 아들이 그 책을 읽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하지만 번역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일이 아예 없으니 말이다.
최근 '눈 먼 올빼미'가 '눈 먼 부엉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되었다고 한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를 여러 명이 번역을 하듯이 말이다.
샤르트르의 '구토'-제목부터 번역이 이상하다. 원제목은 'nausea' 즉 '오심-구역감'이고 구토는 'vomiting'인데-가 너무 이해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기에 구해 보니,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좌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기에 이번 '눈 먼 부엉이'도 그리 확 땡기지는 않는다.
이란어를 영어로 번역하였고, 그리고 그 영어로 된 책을 다시 한글로 번역을 한다?
우리나라 '번역 문학'의 한계성이다.
대부분이 영어로 된 책으로 번역을 시도해야 하니 말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은 이탈리아 책도 영어 버전을 텍스트로 삼을 정도였다고 하니.
만약 이란 서적을 텍스트로 삼은 책이 나온다면 다시 한번 더 시도해 볼 용의는 있다.
흔히 번역은 50%만 이해 해도 대 성공이라 한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욕이 난무하는 '태백산맥'을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을 한다면,
제대로 된 전라도 고유의 사투리의 운율과 찰진 욕설의 맛이나 미학이 느껴질까?
아무리 대단한 번역가를 만나더라도 온전히 옮기기는 힘들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 말에 사투리가 있듯이 당연히 외국어에도 사투리가 있다.
간혹 번역물에서 전라도나 경상도 식의 사투리가 나올 때면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 나름의 맛을 살리려고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였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외국어 노래를 듣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 못하기에 당연히 별 감흥도 없다.
요즘은 우리나라 노래도 듣지 않는다. BTS 노래? 당연히 하나도 모른다.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가사에, 음악적 감성은 완전히 바닥이기에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이 없다.
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음악에 대해 전 세계 사람들이 난리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들 저 지랄들이지???
히브리어, 그것도 지금의 현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3300년전에 쓰였던 고대 히브리어.
2500년전 쓰였던 아람어,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
공통점은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그 언어로 쓰인 책은 이후, 고트어,아랍어,시리아어,색슨족어, 라틴어등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물론 이 땅에서도 예외는 아니라 처음에는 한문으로 이후에는 한글로 번역을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고대 히브리어, 고대 아람어, 고대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약간 신기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람이 극의 극 소수라는 점이다.
즉 그들의 실수나 착오 또는 잘못 입력된 지식이 그냥 진리로 굳어질 가능성이 농후 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등으로 번역된 책들도 참조를 할테니, 완전히 황당한 번역의 위험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게다.
하지만 고대 히브리어 고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그리고 다시 영어로 그리고 한글로.
물론 그 기본적인 내용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올 것이다.
하지만 번역에서 약간의 해석 차이나 오류는 분명 존재 할 터이고, 그것은 서로가 인정하고 넘어가야 마땅해 보인다.
그런데 결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시토 대수도원 원장이었던 아르노 아말리크는 십자군을 이끌고 카타리파 신도들의 영향력이 컸던 베지에시를 공격한다.
마을에 남아있던 정통 기독교인과 이단 카타리파들을 어떻게 구분하여 죽이느냐 라는 부하들의 질문에
"그들을 모두 죽여라. 그러면 신께서 알아보실게다."
잔인성과 극단성으로 유명하였던 그의 명령을 감히 어찌 거스른단 말인가.
그 약간의 단어의 차이, 해석의 차이가
2천년의 긴 역사속에 서로 죽고 죽이는 긴 학살의 터널을 만들었고, 아직도 그 터널의 끝을 알 수가 없으니.
번역 - 그 어려움, 막중한 무게 그리고 그 중요성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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