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것이 한번 읽고 지나가면 끝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너무 재미없거나 땡기지 않는 작품이 아니라면 가능한 두 번은 읽어봐야 그 맛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처음으로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 '도룡뇽과의 전쟁'이라는 약간은 황당한 제목과 배경의 작품에서였다.
이후 잊혀 있다가 몇 개월 전 '평범한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몇 달 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기에 다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요즘은 너무 기억이 없어진다. 지난 시절의 과도한 알코올과 니코틴의 잔재인지 아니면 치매 초기인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간혹 별다른 내용이나 특성은 없어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의도와 나의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접속하는 듯한 묘한(?) 느낌으로 개인적으로 깊이 새겨지는 작품들이 있다.
바로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소설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이가 대학을 다니다 시(詩)를 쓰는 문제로 부모와 다툼을 하고,
우연히 취업한 철도청에서 열심히 일하여 고위직까지 진급을 하고,
은퇴 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자신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제목 그대로의 한 '평범한 인생'의 이야기일 뿐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심장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스스로의 삶을 정리한다.
단순히 철도 공무원으로 누구보다 부지런히 성실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살았다고만 생각한 스스로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 삶의 구석구석에서는 불쑥불쑥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던 '또 다른 나(alter ego)'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생 시절 잡지에 기고할 정도로 깊이 시(詩)에 빠졌었던 '낭만적이었던 나'
공무원으로 은근히 출세에 집착하여 고군분투하던 '억척스러웠던 나'
어린 시절 혼자 모형 울타리를 만들어 놀면서 어머니의 응석받이로 길러진 '우울증적인 나'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위해 교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한 '영웅적인 나' 등등
비록 인생은 하나뿐인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보다 다양한 여러 형태의 삶은 서로 뒤섞여, 때로는 이 삶이, 때로는 저 삶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삶에서 '나'를 규정할 수 있는 '그 하나'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들은 그야말로 '헛되고 헛될 뿐'일 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색깔과 다양한 양태의,
미처 내가 인지하고 있었거나 또는 상상도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삶들' '인생들'이 모여 보다 완성된 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상반되고 때로는 이율배반적이고 때로는 유사한 동질성을 가지기도 하는 그 많은 '나(alter ego)'들이,
논리적인 개연성이나 필연성의 결과로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돌발성이나 특발성등과 혼효(混淆)되어
펼쳐지고 만들어 지는 그 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 등의 총합으로서의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더 비중이 있는 가는 의미가 없다.
때로는 존재하였다는 그 어떠한 흔적이나 기억도 남기지 못한 내 속의 삶들도 있을게다.
하지만 어떤 것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 '나'에게는
그 하나 하나의 삶들이 소중하고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카렐 차페크가 이런 의도로 이 소설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영원히...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읽혀졌고 그렇게 기억되어 질 것이다.-아니면 그냥 다시 잊혀지거나...
작품은 독자의 시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간만에 가슴으로 읽는 소설을 접한 것으로도 마음은 너무나도 풍족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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