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영화 등의 후기

'에라스무스 평전' -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

평전(評傳)이라는 것은 지나간 한 사람의 삶의 흔적과 궤도를 따라가며 그려가기 마련이다.
당연히 먼저 그 시대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고, 그 주위 사람들과의 이러저러한 관계를 풀어가면서 
작가가 도출하려는 그 '인물'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상이 하나하나 잡혀 나가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찌 완벽한 객관성이나 보편성 또는 중립적 태도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더구나 작가가 그 인물을 통하여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뭔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기에 그 어려운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 이입은 필수 불가결인 오히려 핵심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게 없다면, 그냥 위키페디아등에 등록된, 아니면 만화책으로 된 요약집이나 보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 같은 어리숙한 독자가 읽기에도 
'작가가 굉장히 힘들거나 답답했던 모양이구나.'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도한 감정이입이 들어가 버린다면?
약간 애매해지기는 하다.
과연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거지?
 
막혀 있던 증오의 힘인 狂信이 군중과 결합하여 종말론적인 세상을 만들어 가며, 
전쟁의 악마가 이성의 사슬을 끊어 놓으며 미친 듯이 세상을 덮치려는 시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언어는 힘을 잃어버리고,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의 언어만이 난무하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자유로운 사상을 위한 깊은 사고와 사색은 패거리들의 집단적 망상에 짓눌려 버린 시대.
 
스와스티카의 완장과 총칼로 무장한 채 미쳐 날뛰는 저 나치들의 광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자와
한쪽은 파문과 화형 그리고 군대로 무장하고, 다른 한쪽은 종교개혁과 쇠스랑으로 무리지은 백성들의 극한 대립의 시대 한 복판에 자리한 에라스무스.
비록 근 400년의 시차를 두고는 있지만, 아마 작가 츠바이크에게는 동일한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것도 하필이면 독일이라는, 보다 약간 넓게는 유럽이라는 동일한 공간대에서 말이다.
그러기에 작가의 모든 힘겨움이 에라스무스의 삶 구석구석에서 동일시되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
당대에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명성을 누렸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그 존재가 많이 희미해진 것은 사실이다.
'우신예찬'이라는 책의 저자로서 약간 알려진 정도?
그러기에 '에라스무스 평전'이라는 이 책도
에라스무스 개인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나의 신뢰가 구매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츠바이크가 평전으로 남기고 싶었고, 그는 그 유려한 문체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도입부에서부터 느껴지는 감정은, 츠바이크가 그리는 에라스무스.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통해 그렸던 슈테판 츠바이크 대한 상상의 이미지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에 놀랐었다.
격한 대립이나 긴장의 고조는 가능한 배제하고,
번잡하고 시끄러운 노상에서의 막무가내식 댓거리가 아니라 가능한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논쟁 속에서
서로 화해와 타협으로 유럽의 아니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을 지켜나가려는 인문학적인 고고함을 지키려는 이.
 
일반인이 현실의 개인에게서 광기를 목격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광기는 심심찮게 목도하고는 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집단적 광기'는 모두가 합리성과 이성 그리고 지성의 이름하에 버젓이 자행되기에
그 폭풍이 휘몰아치는 그 시기에는, 그리고 그 광풍이 지나간 직후에는 미처 그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광신이란 것은 단지 자신이 세운 체제와 오로지 자신의 신념만을 진실이라 여기며,
그러기에 재판, 검열, 화형등을 이용하여 온 세상을 자신의 감옥 속에 가두어 두려는 맹목적인 관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스스로는 결코 인정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할 수 없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신경과적 질환과 정신과적 질환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는
전자는 자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황이고, 후자는 결코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광신은 신경과적 질환이 아니라 분명 정신과적 질환이다.
특히 그것이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경우에, 그 속에서 날뛰는 개개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광기와 광신 속에 한 시대는 규정되고, 인물은 그 시대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만들어 가곤 한다.
 
1933년 제국의회선거에서 승리한 나치당은 2000여 개의 반유대법안을 통해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이고 전면적인 차별 및 탄압이 공식화하면서,
경제적 약탈, 공직에서의 축출, 물리적 위협 등은 38년 '수정의 밤'을 통하여 직접적인 포그롬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미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츠바이크는 1935년 망명을 통한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이어지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그때까지
'이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우리 모두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한 인문주의자로서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와 자유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추구하던 저자에게 
이 미친 나치 광신자들의 폭력과 살육등의 만행이 끼쳤을 영향은 평범한 나로서는 상상이 어려운 정도일 것이다.
결국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브라질로 떠난 츠바이크는 
세계대전이 더욱 격화되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사라져감에 좌절하여
1942년 부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마지막 유언을 쓰면서 머리에 떠올린 인물 중의 한 명이 바로 이 '에라스무스'가 아니었을까?
연약한 몸으로 오로지 책과 문서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고,
결코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몰리지 않으며, 항상 이성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유럽의 가치를 넘어 세계 시민의 보편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였던 그를.
 
어떤 이념이 현실의 힘이 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 이념이 패배하였거나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정신 세계에서의 가장 역동적인 힘과 가치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그러기에 역으로 여전히 더욱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며 증명되곤 하지 않는가.
어떤 필수적인 필연적인 과정이 늦어진다고 하여 그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고귀하고 드높은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물론 저자는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루터의 사상에 대하여 무리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더구나 독일농민혁명이나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등에 대하여서도 논란의 여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에 대한 개론서라기 보다는 
중세의 한 인문주의자를 통해 나치라는 집단적 광기 광란의 시대를 조명하려는 작가의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너무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인하여 논리 전개나 서술에 무리수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폭풍의 시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