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모여 술을 마신다.
그런데 한 명이 좀 시끄럽다. 그렇다고 술값을 낼 정도로 돈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본인이 좀 안다고 혼자 떠드는데 그 내용이 좀 거시기하다.
시인 소설가 철학 교수들을 욕하는 건 그런대로 참을 만 하지만,
신부님을 면전에 대고 주교, 추기경, 교황을 싸잡아 욕하면서 씨씨덕거린다.
그리고는 자리가 마칠 때쯤 되니 은근히 찝찝하였든지 마지막 한마디 던진다.
'같이 마시고 다 기억하는 놈을 나는 증오한다.'
그러고는 막잔을 들면서 '이제 여러분, 안녕히! 박수 치라! 행복하라! 부으라, 마시라!'.
아니, 그렇게 하면 모든 게 끝인가?
1511년 이 책이 출간되고 각국에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을게다.
물론 그 당시 저자인 에라스뮈스의 명성이 워낙 대단하였던 덕도 좀 보았을게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비해서는,
개인적 관점에서 관심도, 집중도나 흥미등 여러 면에서 다소 떨어지는 듯하였으니 말이다.
특히 문장이 너무 현학적이라 그런지 매끄럽게 읽어 나가기가 다소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잊혀지도록 침묵으로 방치하며,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려는 불경한 교황들입니다."
오우~~ 이 시대에 이런 글을 출판물로 낼 수 있었다니...
그러기에 에라스뮈스는 이 책을 제일 먼저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하는 묘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토마스 뮌처의 농민 혁명과 얽히면서 오랜 기간 금서로 묶여야만 하였다.
그래도 작가 개인의 지위와 사전 포석 탓인지, 이 저작물로 인한 신체적 악형 -당시는 툭하면 화형이니-은 피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날에는 그리 새롭거나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그런 깊이 있는 내용을 던지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시대적 상황, 특히 마르틴 루터와의 얽힌 관계 속에서 그 내용을 더듬어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을게다.
'성직에 있는 사기꾼들이 재미 삼아 혹은 돈벌이를 위해 생각해 낸' '면죄부(또는 성물)라는 거짓 물건'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성서(聖書)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돈벌이와 향락에만 쫓아다니는 교황, 추기경 그리고 주교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들.
그 밖에 군주와 궁정 귀족들, 변호사 등등에 대한 신랄한 비난들.
그런데 왜 어느 지점에서 에라스뮈스와 마르틴 루터는 그렇게 철저히 갈라서야만 했으며,
한 명은 후대인 오늘날 거의 잊힌 존재가 되고, 또 한 명은 과대 포장되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인가?
'시대와 불화하는 지혜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으며, 세태를 거스르는 처신보다 신중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마시든지 떠나든지>라는 주연의 법도에 따라...'
어쩌면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어리석음의 표본이라 설명했던 바로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그 어리석음.
그 결정적 시기에 스스로를 시대와 불화하기를 꺼려하였던 그 선택의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면 그는 '스스로 어리석은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다스릴 줄' 아는 이를 지도자로 모시는 인간들에 대한 경멸감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인지도 모른다.
이미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아무런 소득 없이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채 초라하게 끝났고,
간헐적이지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유럽을 초토화시키는 흑사병, 그리고 그 앞에 너무도 초라하게 무너져 버린 교회들.
영국과 프랑스의 백 년에 걸친 전쟁은 서로를 지치게 만들었고,
더불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유럽, 새로운 시대를 향한 신호가 되었을게다.
그리고 그 혼란의 와중에도 새로운 항로 개척과 무역의 발달은 르네상스로 이어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판적 세계관과 종교관들이 스멀스멀 퍼져가는 16세기 초반.
그때 위대한 한 현자(賢者)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어떠하였는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때로는 너무 조심스럽고 은유적인 비유와 예시로 인하여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지만
- 나도 두 번을 읽고서야 비로소 전체적 글의 흐름과 내용이 눈에 들어왔으니-,
찬찬히 여유를 가지고 그 시대상과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고찰의 시각으로 읽어 나간다면,
일반인들이나 종교인들에게도 나름의 의미 있는, 기억에 남는 책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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