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에 책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오에 겐자부로'의 부고 소식을 접하였다.
일본 문학을 그리 선호하는 경향은 아니기에 작품으로 접해 본 것은 '개인적인 체험', '만엔원년의 풋볼'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 그의 작품보다는 반전 평화주의자등 활동가로서의 그의 활동과 발언등에 의해서 더욱 깊이 남지 않은가 싶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가 '20세기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한 루쉰이라는 이름이 함께 떠오른다.
내가 루쉰를 처음 알고 찾아보게 된 계기는 故이영희 선생을 통해서이다.
생전에 그분이 가장 좋아한 작가로서 주저 없이 루쉰를 꼽고, 그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으니 말이다.
루쉰의 작품으로 누구나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바로 '아Q정전'이 아닐까 싶다.
정말 비루하게 살아가는 '아Q'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가 말하고 싶었던 중국인의 패배근성과 노예근성.
깡패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아들에게 맞은 거나 진배없다. 아들뻘 되는 것들과 싸워 무엇하나?"라고 자조하는 아Q.
반면에 심한 열등의식 피해의식으로 관계없는 발언에 대해서도 자신을 욕한다고 여겨 화를 내는 아Q
그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 바로 '정신 승리법'으로서,
비록 육체적으로는 항상 이리저리 두드려 맞지만 매번 정신적으로는 더 수준이 높은 자신이 이겼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과정을 겪게 되지만, 이상하게 중국 문학은 그 나름의 분명한 색깔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모옌이나 위화등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간혹 루쉰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나 향취가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뭔가 어수선하고, 두서없고, 마른 흙먼지가 폴폴 나는 시장에서 서로 댓거리를 하는 듯한???
하지만 솔직히 이제까지 '아Q정전'이라는 책이 왜 그렇게 널리 인정을 받으면서,
중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었다.
2023년 3월 이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다시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와 전범기업의 강제 동원에 대한 배상 문제가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사죄나 배상하라고 악을 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나'
'중국은 '덕'으로 원수를 갚겠다며 배상 청구를 포기했다'
그런가? 순간 어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역시 중국이 통이 크긴 커구나...'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잘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통 큰 결단은 불타는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에서부터 약간 이상해진다.
이제 우리나라가 이 만큼이나 발전하였는데, 아직도 100년이 더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불가하여야 하나?
왜 우리는 중국과 같은 통 큰 결단을 내리지 못한단 말인가?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말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정리하고, 털 것은 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세상일에 어찌 100% 만족이 가능하겠는가?
누군가는 욕을 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번이 적기가 아니겠는가.
비록 우리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고 쪼그만(?) 섬나라 인간들과 더 이상 싸워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다못해 대법관도 무식하다고 욕 들어 먹는 판에 더 이상 헛소리는 거둬야 할 게다.
이게 바로 정신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아Q가 말한 '지고도 이기는 길을 가는' 그 훌륭한 '정신 승리법'이 아니겠는가.
결국 신해혁명의 와중에 뭣도 모르고 까불며 설치고 다니다 총살당해 죽어가는 아Q
그는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합당한 삶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삶의 여정을 통하여 배우고 깨우치며 변화 발전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낡고 고정된 관념에 사로잡힌 채 고착 강화되어 가는 존재일까?
아Q는 사형대에 선 그 순간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만은 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라며 예수님 마저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에는 의문을 가졌는 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이기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고 평범한 인간은 스스로의 확신에 일체의 의문 없이 그냥 사라져 가지 않을까?
훌륭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1000년 2000년의 시대를 거슬러도 인간은 별 변화 발전이 없는 그런 존재라는 의미인가?
-- 그러면 약간, 아니 많이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아Q정전'이라는 작품도 역시 그러하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그는 단지 1920년대의 중국인의 모습으로서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서도 그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리저리 거대 자본에 의해 무참하게 망가지면서도
스스로는 정신적으로 더 우위에 있어 이겼다는 '정신 승리법'으로 최면을 걸며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말이다.
'외교부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정신에 따라 ( )은 ( )이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존중할 것을 요청한다”라고 밝혔다.'
통상적인,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문구이다.
괄호 안에 집어넣을 나라 이름은 무엇일까?
또 '한국'과 '일본' 문제인가? 이번에는 아니다. '베트남'과 '한국'이다.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는 우리와 분명히 격(格)이 다른 답변을 내고 있다.
--- '아~ '우리'라고 단정하기는 너무 쪽팔리니 '2023년의 한국 정부'라고 하자'
이것은 지난 9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에 불복한 한국 정부가 항소를 한 사실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정부에서는 '너무 오래전 사건이며 우리 군이 가해자라는 임을 증명할 수 없기에 실제적 진실에 기초한 더욱 세심한 사실 관계 확인이 중요하다'며 항소를 하였고,
참전 군인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였다고 난리를 피우고.
대부분의 언론은 무시하고 지나가고, 시민들은 보도되지 않으니 모르고 지나가고...
여기서 다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정부와 관변 단체들의 성명에서 일본과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는가?
물론 1심 판결에 대한 항소이기에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항소심이나 대법까지 가는 경우 그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등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과연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배상을 청구할, 배상을 받을, 그리고 그에 대해 항의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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