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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쓸데없는 이야기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전설의 강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여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만약 키가 크면 목이나 다리를 자르고, 짧으면 억지로 늘려서 침대 크기에 맞추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한 명 빼고는 다 죽였는데, 다행히 겨우 살아남은 그 한 명은 노예가 되어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내가 제공하는 그 좋은 침대가 사람들에게 너무 크거나 너무 작으면 안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알맞다고 생각하여 만든 침대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죽은 아들이 저승에서 외로이 있을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극히 도덕적 행위이기도 하고.
 
'논리'란 항상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최대한 합리화하여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스스로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면서 반복적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 이는 없다. 할 수가 없다.
물론 처음에는 그 정당성에 의문이 들어 주저하거나 일시적으로 거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일단 한번 해 보면', -머리나 다리를 자르거나, 몸통이나 사지를 길게 늘여보면-
그 이후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황당한 스스로가 정한 말도 되지 않는 기준은 점점 더 체화되어 절대적 가치를 가지게 되고...
 
최근 책 같지도 않은 책 한 권이 잠시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르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쓴 책인 모양이다.
스스로가 불리하다가 여겨지던 시기에는 도망치듯 외국으로 나가 숨어서 지내다,
최근 정치 검찰이 설치기 시작하니 다시 제 세상인 줄 알고 경칩(驚蟄)에 맞춰 개구리처럼 튀어나온 양상이다.
여기서 잠시 '진실'이라는 허깨비를 생각해 본다.
스스로가 만든 침대에 그 '진실'의 목이나 다리를 자르거나, 아니면 쭉쭉 늘리려 안간힘을 쓰는 '前검사'의 애처로움과 함께 말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내다가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와 그에게 홀딱 빠진 마누라의 역성에,
다카키 마사오에 충성을 맹세한 늙은이들의 광기와 조중동의 혁혁한 도움에 힘입어 대통령까지 오른 그에게,
'정치'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아니 '국가', '시민', '역사'라는 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냥 너무도 익숙한 검찰과 그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찰 수사관등이 확장된 세계
그리고 그들의 발표에 두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과 너무도 말을 잘 듣는 강성 지지층의 확장된 세계
그리고 그들이 잡아 족쳐야 하는 범죄자나 아니면 서로의 뒷배가 되어주는 정상 모리배들의 확장된 세계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침대가 되는 것이다.
 
안철수는 다시 '팽'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얕은 잔머리 속에 스스로 그렇게 버려졌을 뿐이다.  
나경원도 '팽'당한 것 같은데, 스스로는 '대승적 결단'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요즘에는 할 말이 없으면 '대승적 결단'이다. 귀중한 언어가 너무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
몇몇은 살아남아 권력을 이어간다.
하나의 전제 조건을 충족시킨 이들. 바로 '충성 맹세'와 '굥비어천가'를  부르짖는 노예들로서 말이다.
그리고 역시 최고의 오래되고 쓸만한 노예는 아직은 장관직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어차피 그는 '운명공동체'라 자부(?)하고 있을 테니, 그런데 그는 알고 있을까, 언젠가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을?-
 
살아있는 권력은 여전히 힘이 막강하다.
수십 년간 나름 정치를 하였다고 떠들든 이들도 모두 한 방에 보내버리니 말이다.
이것이 정치권력의 힘인지, 아니면 검찰 권력의 힘인지, 
아니면 불과 1~2년만에 모든 것을 장악해 내는 신통한 점쟁이를 등에 업은 개인의 능력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우주의 기운'을 운운하며 숭례문을 오방색으로 덮으려 하며 난리를 부린 지 채 몇 년이 지났다고...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고? 그건 이 땅을 겪어보지 못한 마르크스의 착각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역사에서는 니체의 생각이 맞는가 보다. '영원히 반복될 터이니 말이다. - 단지 약간의 얼굴만 달리 한 채 말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백을 천을 봐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아마 아직도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애처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희망'이라는 미물(微物) 때문이겠지.
어제는 다시 윤은 노무현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거짓말이라는 게 금방 드러나는 그런 낯 부끄러운 내용으로 말이다.
더구나 어제는 '검수완박'의 법령도 효력을 완전히 인정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일 배상권 청구'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도 무효화하려는 이 위헌적 권력에서,
그 같은 시덥잖은 법령을 깔아뭉개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의 머릿속에 만들어져 있는 '침대'는 어떠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마 어쩌면 그 스스로도 잘 모르지 않겠나 싶다.
신통한 점쟁이와 스스로의 신기(神氣)를 자랑하는 마누라의 합작품에,
자신은 '검사'라는 숟가락만 올렸을 뿐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민족적 정기는 우리의 미래는
그들의 뜻대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짤리우고 늘어져가며 겨우겨우 버텨가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