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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쓸데없는 이야기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그것 하나 제대로 딱딱 못 맞춰?' 
예전 '쓰리랑 부부'에서 순악질 여사로 나왔던 김미화씨의 대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뭘 하나 제대로 딱딱 잘 맞춘다는 게 참으로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뭐를 제대로 해보려면 대부분 조금 늦거나 때로는 너무 앞질러 설치는 꼴이 되어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시간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균일하게 주어진 것 같은데,
각자가 그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는 과정이나 흐름을 보면 가장 불공평한 게 또한 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구에게는 너무 넘쳐서 난리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모자라 허득이게 하고
더구나 가장 가슴 쓰리게 아프게 하는 것은 소위 그 타이밍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으니'...
 
일주일에 4일 정도를 온전히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하여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실정이다.
비록 큰 일은 없다 하여도 자리는 지켜야 하는 것이 월급쟁이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저녁에 일과를 마치고 2~3시간 근처의 야트막한 산 두 개 정도를 오르는 여유를 가지고,
낮과 밤은 거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이런저런 자료들이나 뒤적이며 보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그렇게 꼭 나쁘지 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라는 글이 간혹 생각나기도 한다. - 50 후반에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이라 강력 추천한다.-
만약 30이나 40에 이런 시간과 공간을 가졌다면 어쨌을까?
아마 뻔할 게다, 맨날 술 담배에 모임에 유혹에 찌들어 버렸을 테지 않겠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던 시절이 약간은 그립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균일하게 주어진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그냥 자연스레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적 시간'
각자의 선택에 의해 의식적이고 주관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기회와 결단등의 '카이로스(Kairos)적 시간'
태어나서 죽기까지 보편적으로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충 60년 정도의 시간들.
누구에게나 균일하게 주어진 것 같지만, 각각의 삶의 과정이나 그 내용의 충일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울림과 깊이와 광폭(廣幅)의 차이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22년 164일을 살았던 잔 칼망과 19년 4개월로 추정되는 삶을 살았던 잔 다르크.
자연스레 '크로노스(chronos)적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적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 이 나이에 나는 솔직히 전자가 좋아 보인다. 배신과 개죽음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 
 
이렇게 홀로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처음에는 약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정도로 비교적 가볍게 예상하였지만,
최근 부동산 등의 경기 상황으로는 최소 2년은 더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솔직히 반반(半半)이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은 것이 결코 인생에 도움이 될리는 없을 게다.
식사나 잠자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가나 휴식을 취하거나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혼자'라는 것은 과히 권할 만하지는 않아 보인다. 4~5개월의 경험 속에서.
하지만 50 후반의 나이에 어느 일정 기간 온전한 자기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고 느껴진다.
 
자신을 돌아본다?, 삶을 깊이 생각한다?, 세상을 관조하며 바라본다?
뭐 그리 대단한 주제를 띄우고 싶지는 않다.
그냥 '약간 더' 스스로에게 침잠해질 수 있는 시간, '약간 더' 전체를 보려는 시간등이 있을 뿐일 게다.
결국은 그 '약간 더' 있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 아니겠는가.
 
지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 체력적 한계? 뭐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린 시절이나 젊었을 때나 매 마찬가지로 머리의 한계이다.
뭔가를 생각해 보려 해도, 뭔가를 정리해 보려고 해도 모든 것들이 이리저리 날려 다닐 뿐이다.
책을 보려 하여도 페이지는 넘어가지만 그 내용을 따라가기는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
특히 돌아서면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언제 읽었지? 어디서 봤었는데, 어디였지?
이리저리 공책등에 메모나 정리를 하기도 해 보지만, 그게 덮으면 그만이다.
예전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책처럼 매정한 놈이 없다. 덮으면 끝이니 말이다."
 
50을 훌쩍 넘은 지금 이 시간이 아니라,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이런 기회를 가졌다면...
내 몸이 조금 더 건강할 때 오늘날의 생활 습관을 가졌더라면...
항상 중요한 것은 너무 일찍, 아니면 너무 늦어서야 찾아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