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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쓸데없는 이야기

제갈 량에 대해

비록 역사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개인적으로 '제갈 량(공명)'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소설 속의 제갈량'과 '정사(正史)의 제갈량' 그 사이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지?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글이기에 그냥 재미 삼아 소설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마 우리에게 알려진 중국인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을 뽑으라면, 열에 일곱여덟은 제갈량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그는 '삼국지'를 통하여 동양인에게는 깊이 각인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소설 속에 그려지는 그의 이미지를 대충 정리해 본다.

첫째가 일단 무엇보다 엄청 똑똑하고 명석하다는 점이다.

'와룡(臥龍)'이라는 그의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의 인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였던 모양이다.

둘째가 신하로서 충성심이 매우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명 문장으로 알려진 '출사표(出師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시기 가장 힘이 약한 유비를 모시면서도 그의 사후에까지 한결같은 마음을 이어가려 노력하였으니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닐 게다.

셋째,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는가?

그건 애매하다. 장판교 싸움의 배경이 되는 형주에서 후퇴하는 과정에 그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떠난 것이,

백성들이 조조에게 받을 핍박을 걱정해서 인지-그런데 유비도 그들에게 그다지 풍요와 번영을 준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면 백성들을 방패로 위나라의  추격 속도를 늦추려고 하였던 건지 애매한 상황이라 단정적으로 규정하기가 애매하다.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대충 넘어가자.

 

제갈 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큰 전투는 3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가 적벽 대전이요,

둘째가 '맹획칠종칠금(孟獲七縱七擒)'으로 유명한 남만 정벌이요,

셋째가 바로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 천하통일의 대업을 위하여 기산을 6번(?) 오른 일이다.

 

제갈 량의 명성이 널리 떨치게 된 계기는 역시 적벽 대전에서의 몇 가지 신화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세히 선입견을 벗고 들여다보면, 과연 그렇게 높이 평가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문스럽다. 

먼저 '적벽(赤壁)'이라 일컬어지는 곳의 지형을 보면 도저히 대규모 선단이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냥 남하하는 조조가 제법 큰 강을 건너 군사를 이동하기 위하여 배가 필요하였을 뿐일 게다.
그러기에 흔히 회자되는 화살 10만 개 사건이나 남동풍등은 논증하기 어려운, 아니 약간은 유치한 소설적 장치일 따름으로 여겨진다.

주유(周瑜)는 죽는 순간 '旣生瑜 何生亮'이라 '왜 하늘은 주유를 내어놓고, 어찌하여 또 제갈량을 내어놓았는가'라고 한탄하였다는데,
실은 이렇게 바꿔야 할 게다.'旣生瑜 何生本'이라 '왜 하늘은 주유를 내어놓고, 어찌하여 나관중을 내어놓았는가'라고 한탄해야 할 게다.-성은 나(羅)요 이름은 본(本)이요 호는 관중(貫中)이기에-
적벽 대전은 거의 모든 것이 주유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갈량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움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주유의 입장에서는 원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제갈 량은 주유를 비롯한 오(吳)나라 군대가 죽어라고 위나라 군대와 싸우는 틈을 이용해서,

약속을 어기고 기습으로 형주를 점령하여 유비 세력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을 뿐이 아닌가?

그게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기에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둘째 남만 정벌은 참으로 대단한 역사(役事) 임에는 분명하다.

오늘날은 차(茶)로 유명한 운남성 일대를 정벌하였다는 의미인데, 개인적으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이런저런 지형이나 전법을 이용한 전투등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리 관심이 없다.

요즘에는 '알코올성 치매(?)'의 여파인지 세세한 것들은 거의 다 기억에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상대편 왕(王)이었던 '맹획'을 일곱 번 생포하여 일곱 번 풀어주는 그 의미는 다시금 새겨 본다.

예전 '비잔티움 연대기'라는 역사서를 읽으면서 가장 큰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이럴러면 왜 그 먼 원정을 떠나는 거지?'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중세의 나라들끼리 무수한 정복 전쟁이 진행된다.

하지만 항복문서나 협정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정복자가 점령지를 떠나는 그 순간 바로 다시 전쟁은 시작된다.

무수한 왕들은 이 나라 저 나라로의 행군으로 길 위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마무리되거나 항복문서나 협정 내용이 지켜지는 일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러기에 비록 '영원히'는 아니라 하여도 당사자의 시기에는 그래도 그 문서가 효력을 발휘될 수 있는

그런 나름의 '전일적(全一的) 항복'의 좋은 예가 바로 제갈 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이는 단지 전쟁이라는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여겨진다.

흔히 사람들은 '개혁(改革)'을 외치곤 한다.

하지만 그 '개혁'이라는 괴물이 어떤 제도나 사람 몇몇을 바꾸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이제까지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겠는가?  

언론, 사법, 행정, 군부, 경찰 등등 전반에 걸쳐 있는 썩은 부패의 뿌리는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근대혁명(近代革命)'을 이루어 보지 못한 이 땅에서 그 뿌리는 더욱 깊고 깊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피지배자들에게마저 골수(骨髓)에 깊이깊이 그 썩은 인이 박여버릴 정도이니 말이다.  

당시 수도인 오늘날의 '청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장기간의 원정은 제갈 량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중요한 군비를 비롯한 물자 수송이나 군사력 보충과 교체등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전일적 항복'을 받아 놓지 않고 그냥 1~2번의 항복에만 만족하고 귀국해 버린다면,

이 원정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그 모든 위험과 부담을 감내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힘든 정치 사회적 상황을 보면서 간혹 이 교훈을 되새기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는 한다.

뿌리째 모든 것을 바꾸는 '전일적 개혁'의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서 말이다.

 

셋째는 역시 중원 정벌이다.

선왕 유비(劉備)의 뜻을 이어받아 본인이 '기산(祁山)'을 6번 오르고-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지만 상세한 내용은 약간 다르다, 대충...-,

그 유지(遺志)를 받은 강유가 9번 올랐다고 전해진다.
결과는? '다 졌다.'
그 시대에 6번이나 대규모 출병을 한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국고의 소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일단 강유는 빼고-

먼저 AD 230년 경의 중국 인구를 잠시 살펴보자.

당시 위나라의 인구는 440만 명, 오나라는 2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면 촉나라는? 90만 인구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다.

즉 인구 90만의 '소국'이 자신보다 몇 배나 강성한 '대국'을 점령하기 위해 6번이나 출병을 한다?

촉나라는 시인 이백(李白)이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한 사람이 지키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한다.'라고 읊었듯이,

수비에는 천혜의 요새인지 모르지만 타국 그것도 대국(大國)을 공격하기에는 여러모로 불리한 지형이다.

 

손자병법에도 이르기를 '적군보다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의 병력이면 공격하고,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라'라고 하였는데,

이 시기 제갈 량의 '깊은 뜻(?)'은 내 수준에서는 감히 더듬기가 어려울 뿐이다.

부족한 군사력이나 기타 제반 어려움 '그 모든 것은 내 머리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서 워낙 '천재'라고 떠받드는 데 익숙하다 보니, 제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결과? 

끊임없이 자기를 아껴주고 믿어 주었던 선왕 유비의 평생 숙원을 꼭 이루어 주겠다는 강한 집념? 

 

왜 제갈 량은 그렇게도 무리와 억지를 쓰면서 까지 중원 정벌, 나아가 '한(漢)'의 재건에 집착하였던 걸까?

그러려면은 자신의 분명한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다 못해 '황건적'처럼 백성을 위한다는 거짓 명분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왕의 유지(遺志)' 그뿐이다. 그 어디에도 '백성'은 없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였다면 그런 쓸데없이 무리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검문관'이라는 천혜의 관문을 지키면서 내치(內治)에 전념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여야 했을 것이다.

 '이런 험지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나라를 망하게 한 '유선'이 참 한심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약간 수정하여야 할 게다.

어차피 유선이 어리고 우둔하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를 탓해서 뭣 하겠는가?

내 개인적 입장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던 제갈 량을 탓하거나, 그 시기에도 기산에 가 있었던 강유를 탓하여야 하지 않나 싶다.

 

혹자는 평상시에 제갈 량이 정치를 잘하고 농업과 상업을 잘 다스려 충분한 군량미를 비축하였다고 할 것이다.
설령 아무리 충분한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사력을 유지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자주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려면 엄청난 규모의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국가나 백성들에게  '꼭' 필수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본적인 삶만을 강요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이렇게 거의 '준전시(準戰時)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총력전(total war)' 즉 '전체주의 전쟁(totalitarian war)'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솔직히 본인이나 장군들은 뒤에서 지휘만 하기에 생명에 지장이나 위협이 덜하겠지만,

고대 전쟁에서 직접 칼과 창을 들고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일반 백성들은 다르지 않는가?

 

진정 그가 백성들의 뜻을 받드는 현명한 지도자였다면,

그런 무리한 정복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먼저 삼국의 안정-진정한 의미의 '삼국정립'-을 도모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내치에 전념하여 국력을 충분히 키운 이후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순리였을 게다.

그런데 그는 왜? 그리 똑똑했다는 그는 왜?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었기에?

 

어린 중고등 시절 '삼국지'에 깊이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40여 년 전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전집으로 출간된 대부분의 삼국지는 일본책의 번역본-무단 불법적-이었다고 한다.

아마 내가 그리 열심히 읽었던 그 전집도 그러할 것이다.

이후 대만 중국등의 몇 가지 '삼국지'를 더 읽으면서,

역시 나이나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그 사실 여부를 규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그 해당 시절에 어떻게 해석되고 이해되는 가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는 다시 새롭게 살아나고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