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다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속도에만 급급하면서 빨리 가는 것 같아.'라고 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는 말이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들은 천천히 즐기면서 다니는 데, 특히 한국 사람들이 유별난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첫째, 외국에서 직접 산을 다녀본 경험이 거의 없거나
둘째, 한국에서도 그리 열심히 산을 다니지는 않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알프스 3대 북벽'으로 꼽히는 아이거 북벽(north face), 마터호른 북벽, 그랑드 조라스 북벽
이곳을 그냥 오르는 것이 아니라
프리 클라이밍이라 하여 로프나 어떠한 보호 장비도 없이 홀로,
더구나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에 경쟁적으로 올라가는 이들이 있다.
정말 미친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약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당연히 조금만 실수를 하여도 부상이 아니라 바로 사망으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스포츠.
그렇지만 그들은 당연한 수순처럼 유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8000m 산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에 같은 방식으로 도전하기에 이른다.
정말 완전 완전 미친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러기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그리고 당연히 그만큼 더욱 위험해지고...
우리나라의 등산이나 마라톤 문화는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대부분이 1000m 내외의 자그마한 산들이 펼쳐져 있는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천 미터의 고봉들이 수백에서 수천 킬로 미터씩 이어져 있는 알프스나 PCT 또는 로키 산맥들
그 아름답고 광활한 그리고 당연히 수반되는 위험천만한 깎아지른 암벽과 절벽들
그 자연에 푹 빠져버린 '미친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극단적으로 보이는 모험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 땅과는 달리 그들은 자국에서 나름 유명 인사로서 TV쇼등에 출연할 정도이고
특히 새로운 기록 등은 주요 뉴스로 다루어지곤 하니 그 인기나 관심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게다.
그럼 그들 극소수만이 유별난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어쩌면 세상의 대부분은 피라미드형 구조가 아닌가.
최정상에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밑에 그 정도는 안되지만 나름 열심히 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고,
그리고 그 밑에는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노력하고 있고, 그 밑은 더 많은 이들이 즐기려 하고.
'사람은 떨어져도 신발은 붙어 있다'는 전설(?)의 암벽화니, 절벽에 치는 텐트(포타렛지)니 하는 상품들이 소비가 없는데도 기업에서 만들어 내겠는가?
그것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말이다.
충분한 시장이 있기에 경쟁을 하며 생산 판매 유통을 하는 것이다.
샤모니나 체르마트를 가면 긴 로프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수히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단순히 율리 스택(Ueli Steck)과 다니 아놀드(Dani Arnold) 라는 스위스의 초고수 암벽 등반가의 경쟁만이 아니라,
진정한 알피니즘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지 않은가 싶다.
더구나 한 달 전 다녀왔던 '아이거 북벽'-당연히 그 주위만 걸었지만-을 보면서 잠시 회상에도 잠기게 해 주고.
마라톤을 할 때나 산을 다니면서 간혹 들은 말들이 있다.
스스로가 마라톤에 미친 것 같다고 하면서 10km나 하프 마라톤 참가 경험을 떠들고 있거나,
한 달에 한두 번 4~5시간이나 10km 내외의 산행을 하면서 스스로를 산에 미쳤다고 떠드는 사람들.
(물론 율리 스택이 아이거 북벽을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이 2시간 22분이니 시간이나 거리가 중요한 건 아니다.)
아마 1000m 내외의 올망졸망한 산들로 덮힌 좁은 땅덩어리가 문제는 아닐 게다.
그냥 자신이 하는 것이 최선이고 모든 것의 기준이라 여기려는 그런 의식의 결과가 아니겠나 싶다.
나보다 더 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고 나 보다 못하는 것은 무능한 것이라 여기며,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것들은 단지 내가 의미를 두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라 자족하면서 말이다.
1시간 30분 분량으로 보는 내내 긴장감을 놓칠 수 없는 너무도 매혹적인 이 '미친 Race'
뭐, 그렇다고 나도 해보고 싶다거나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전혀 생기지는 않는다.
ps) 컴퓨터 화면으로 보지 않은 것은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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